'친하니까 괴롭힌거야'…'계곡 살인' 가스라이팅 정황

"무시당해 힘들다" 호소하면서도 못 벗어난 피해자
전문가 "가스라이팅 범죄로 성립되기 어려워"
"장기적·반복적 가스라이팅 범죄 인정 재고 필요"

'계곡살인' 사건의 피의자 이은해와 조현수가 지난 19일 오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아시아경제 강주희 기자] '계곡 살인' 사건의 피의자 이은해와 조현수는 이씨의 남편이자 피해자인 윤모씨에게 다이빙을 강요해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다. 윤씨가 수영을 못하면서도 스스로 다이빙을 하고, 일정 수준의 연봉을 받았음에도 사망 직전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 배경에 대해 전문가들은 윤씨가 이씨로부터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 당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지난 22일 SBS는 이씨와 윤씨 간 전화통화 녹취와 윤씨가 조씨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등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이씨가 윤씨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도록 하는 발언을 지속해서 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다수 확인된다.

윤씨는 지난 2019년 1월 이씨 내연남인 조씨에게 "은해에게 존중받고 싶다", "무시당하고 막말 듣는 게 너무 힘들다" 등 자신이 이씨에게 무시당해 고통스럽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윤씨가 이씨로부터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스라이팅은 피해자의 심리나 상황을 조작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고,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심리적 학대를 뜻하는 말로, 연인·친구 등 친밀한 관계에서 주로 나타난다.

윤씨는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이씨에게 머리채를 잡히는 등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윤씨가 이와 관련해 이야기를 꺼내자, 이씨는 통화에서 "내가 있잖아, 술 먹으면 제일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막 대하거나 막 괴롭히거나 그래"라고 답한다. 이씨는 또 "오빠를 무시해서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니라 (나는) 그냥 그래"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잘못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피해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행위는 가스라이팅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피해자 스스로 괴롭힘당함을 인지하기 어렵게 한다.

'계곡 살인' 사건의 피의자 이은해(31)가 16일 오후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지방검찰청으로 압송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윤씨 유족 등에 따르면 윤씨는 일정 수준의 연봉을 받는 대기업 연구원 출신이었으나 이씨와 결혼한 뒤 개인회생을 신청하는 등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이씨와 윤씨는 지난 2017년 3월 혼인신고를 한 뒤 인천에 신혼집도 마련했지만, 신혼집에는 이씨만 살았고 윤씨는 직장 근처인 수원의 반지하 월세방에서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이씨가 친밀한 관계를 이용해 경제적·심리적으로 윤씨를 완전히 통제했다고 분석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KBS라디오와 인터뷰에서 "이씨가 악의를 가지고 윤씨를 이용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비슷한 걸 했다. 마치 사랑을 줄 것처럼 계속 이야기 하지만 전혀 부부에 해당하는 관계를 유지해주지를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헌신적인 애정을 이용해서 결국은 가스라이팅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심리적인 압박을 (윤씨에게) 했다"며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피해자가 왜 벗어날 수 없었는가, 이해가 잘 안 될 수 있지만 여러 번 위험한 상황에 처해서 결국은 목숨까지 잃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죽음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가스라이팅의 심각성은 커지고 있지만, 가스라이팅 행위 그 자체만으로는 범죄 행위가 성립되기 어렵다. 피해자에게 직접적으로 폭행이나 위해가 가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법 행위의 영역으로 볼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은의 변호사(이은의 법률사무소)는 "가스라이팅은 애정 관계를 기반으로 하고, 상대를 이해하거나 좋아하는 애정이 권력으로 작용한다"며 "폭력, 협박 등 위력이 행해지지 않았다면 가스라이팅을 범죄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다만 가스라이팅이 심각한 범죄행위로 연결될 수 있는 만큼 이를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변호사는 "범죄로 의율하긴 어렵다고 하더라도 친밀한 관계에서 장기적으로 가스라이팅이라고 여겨질 만한 객관적 행위, 학대가 발생했다면 민사상 불법행위 차원에서 인정되는 방향으로 재고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강주희 기자 kjh818@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이슈취재부 강주희 기자 kjh818@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