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위해 달리다 팔리고 도축되고…경주마의 비애[안녕? 애니멀]

오직 '속도'로 매겨지는 경주마 가치
은퇴 후엔 여기저기 팔려 나가거나 도축돼
동물권단체 "경주마들의 희생이 정말 인류사에 꼭 필요한가"
"경마 산업 수익, 말에게 돌아가지 않아…경주마 복지에 쓰여야"

경주마들을 위한 복지 체계가 구축돼야 한다는 동물권단체들의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사진=픽사베이

[아시아경제 박현주 기자]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서 주인공 성훈(이정재 분)은 딸의 생일선물을 살 돈을 불리기 위해 경마장으로 향한다. 고심하다 내건 첫 번째 베팅에서 명마라고 생각했던 9번마 '트리플라인'이 3번마 '잭프린스'에게 따라 잡히면서 성훈은 돈을 잃고 만다. 만약 이 장면이 현실이라면, 과거에 비해 기량이 떨어진 트리플라인은 어떻게 될까.

인간의 유흥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주마 문제는 과거부터 수차례 논란이 돼왔다. 경주마들의 가치는 오직 '속도'에 따라 매겨지므로, 생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예전보다 빨리 달리지 못하면 퇴역하게 된다. 경주에 쓰이지 못하는 경주마는 대개 승용, 번식용 등으로 여기저기 팔려 가거나 도축 후 고기로 쓰인다.

위성곤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한국마사회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6년부터 2020년까지 국내에서 매년 평균 1,391마리의 경주마가 경마장을 떠났다. 이 가운데 30%(422마리)는 승마장에서 사람을 태우는 용도로, 12%(166마리)는 번식용으로 팔려나갔다. 성훈이 돈을 걸었던 트리플라인의 은퇴 후 운명도 이 가운데에서 정해질 확률이 높다.

도축 후 고기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도축과정은 대개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지난 2019년 국제동물권 단체 '페타'가 제주 경마장에서 도축장으로 직행한 말들의 모습을 공개했는데, 영상에는 막대기로 말의 얼굴을 내리치는 도축업자들과 겁에 질린 말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은퇴한 경주마들의 복지 문제는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 출연했던 말 '까미'의 죽음을 계기로 재점화됐다. 드라마 속 낙마 장면을 촬영하던 도중 제작진이 배우를 태운 까미의 다리에 와이어를 묶어 강제로 넘어지게 하면서 까미의 목이 꺾인 채 바닥에 고꾸라졌다.

당시 까미는 살아있었으나 일주일 뒤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동물 학대'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까미는 과천 경마장 일대에서 5년여 간 경주마 생활을 하다 퇴역한 이후, 말 대여업체에 팔려왔다. 말의 평균 수명은 25년 이상이지만 경주마의 은퇴 시기는 대략 2~4살으로, 까미 역시 5~6살로 추정되는 어린 말이었다.

한국동물보호연합 등 동물보호단체가 지난달 21일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태종 이방원' 드라마 동물학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이를 두고 동물권단체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한국동물보호연합 등 100여개 단체는 지난달 21일 서울 여의도 KBS본관입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위험천만하게 동물을 위험에 빠뜨리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하고, 2개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 사실을 은폐하고 넘어가려 했던 KBS의 파렴치한 행동을 묵과할 수 없다"며 "이러한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도 엄중한 처벌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KBS는 동물학대 의혹에 대해 사과했다. KBS 지난달 24일 "KBS는 드라마 촬영에 투입된 동물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며, 시청자 여러분과 국민께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린다"면서 "동물의 생명을 위협하면서까지 촬영해야 할 장면은 없다. KBS는 이번 사고를 생명 윤리와 동물 복지에 대한 부족한 인식이 불러온 참사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후 지난 10일에는 프로그램 제작 전반에 적용할 동물 안전 제작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주마 복지'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았다. 이에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경주마 전 생애 복지체계 구축을 위한 국회 토론회'에서는 퇴역 경주마 복지 향상을 위한 여러 방안들이 논의됐다. 토론회에서는 해외 모범 사례를 토대로 경주마 복지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동물을 이용해 번 수익이 동물에게도 돌아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동물권단체는 인간의 오락, 유흥수단으로 동물을 학대하는 경주마 산업에 대해 비판했다. 조희경 동물자유연대 대표는 "경주마의 생애는 한 마디로 '인간들의 돈벌이 기계, 도구'라고 볼 수 있다. 경주마로서의 삶은 몹시 고단하다. 달리기 위해 훈련받는 과정, 경주 과정이 몹시 혹독하다"면서 "경주마들의 희생이 정말 인류사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많은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마사회를 향해 경주마 복지 체계 구축을 촉구했다. 조 대표는 "(경마라는) 사행산업에서 생기는 수익이 마사회와 마주, 그리고 경기에 베팅한 사람들에게만 돌아가고 있다. 정작 경주마와 퇴역마에 대한 복지는 이뤄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며 "경마 수익금이 가장 먼저 퇴역 경주마를 포함한 모든 경주마들의 복지를 위해 우선 배정돼야 한다. 경주마들의 희생으로 움직이는 시장에서 그 수익이 경주마에게 돌아가지 않는 구조는 인간의 극단적 이기심에 의한 동물 착취"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박현주 기자 phj0325@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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