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주형기자
[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한국 영화계 역사상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74)의 언변이 전세계를 사로잡았다. 연기 인생 56년차에 접어드는 원로배우인 윤여정은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하거나 괜한 무게를 잡지 않는다.
대신 직설적이면서도 유머 섞인 발언으로 청중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가 시상식에서 구사하는 '브로큰 잉글리쉬(broken english·어법에 맞지 않거나 비격식적인 영어)' 조차 매력이 된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가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됐던 지난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특유의 입담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시 그는 "사실 이 영화 안 하고 싶었다"며 "고생할 게 뻔하기 때문"이라고 독립영화 촬영 현장의 어려운 환경을 가감없이 고백했고, 관객들을 웃음 짓게 만들었다.
윤여정의 직설적인 언변은 한국 배우 최초로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지난 12일(현지시간)에도 여지없이 빛났다. 당시 시상식장에서 그는 "고상한 체 하는(snobbish) 것으로 알려진 영국인들이 저를 배우로 인정했다"며 "영국인들이 좋은 배우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 있고 영광"이라고 농담을 건네 청중의 박수 갈채를 받았다.
지난 25일 열린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미나리' 제작자인 배우 브래드 피트를 이제서야 만나게 됐다"며 "그 동안 어디 있었나"라고 재치 있게 수상 소감을 시작했다.
또 "저는 한국 배우인 윤여정이라고 한다"며 "그런데 미국이나 유럽에 계신 분들은 저를 '여'나 '정'이라고 부르신다. 제 이름을 잘못 부르신 것에 대해서는 용서를 해드릴 것"이라고 꼬집어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윤여정은 일부 기자들의 '짓궂은' 질문에도 재치로 일관했다. 시상식장 백스테이지에서 한 취재진이 '브래드 피트에게선 무슨 냄새가 났나'라고 묻자 그는 "나는 그의 냄새를 맡지 않았다. 난 개가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이와 관련해 영국 매체 '더 타임스'는 이날 "윤여정은 올해 영화제 시상식 시즌에서 우리가 뽑은 공식 연설 챔피언이다"라며 "이 한국 배우는 이번에도 최고의 연설을 했다"고 평했다.
영국 공영 방송 'BBC" 또한 "'브래드 피트에게 무슨 냄새가 났느냐'는 질문에 '나는 개가 아니다'라고 답변한 것은 이번 시상식 최고의 멘트"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대배우 반열에 오른 윤여정이지만, 그는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윤여정은 이날 시상식 소감에서 마리아 바칼로바, 글렌 클로즈, 올리비아 콜맨, 아만다 사이브리드 등 할리우드 배우들과 함께 선 것이 영광이라고 전했다.
윤여정은 "우리 사회에서 경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5명은 모두 다른 영화에서 다른 역할을 해낸 것. 우리는 모두 승자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내가 어떻게 글렌 클로즈와 같은 대배우를 이길 수 있겠는가"라며 "그의 훌륭한 작품을 많이 봐왔다"라고 개인적인 존경심을 전하기도 했다.
향후 계획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없다"며 "오스카상을 탔다고 윤여정이 김여정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늙으니까 대사를 외우기 힘들다. 남한테 민폐 끼치는 건 힘드니까 남한테 민폐 끼치지 않을 때까지 이 일(연기)을 하다 죽으면 좋겠다"고 소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윤여정은 이번 시상식을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최초의 한국배우가 됐다. 아시아 여배우로는 지난 1957년 공개된 영화 '사요나라'의 우메키 미요시 이후 63년 만이다.
그가 출연한 '미나리'는 한인 이민자 가족의 미국 정착기를 그린 영화다. 미나리는 여우조연상 외에도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음악상 등 총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