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인터뷰] '외환·금융위기 구원투수' 전광우 '정부, 디딤돌 놓기보단 걸림돌 빼야'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이 아시아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문호남 기자 munonam@

경제성장률 숫자·순위에만 집착

'재정만능' 정부 주도 경제살리기

젊은 층 '영끌' 투자 등 곳곳 부작용

기업지원·규제완화·노동개혁 등

돈 안드는 경기 부양책부터 집중

민간기업 자생력부터 키워야

[아시아경제 김은별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바라보는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IGE) 이사장의 시선은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2008년에도 초대 금융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그해 발생한 금융위기 충격을 최소화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았었다. 전대미문인 코로나19 위기 대응에 대해 전 이사장은 "당장의 현금지원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경제가 연착륙할 수 있는 방안에 정부가 무게를 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 이사장은 지난달 말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세계경제연구원에서 진행된 아시아경제신문과의 신년인터뷰에서 "올해 정부가 고민할 것은 경제성장률 수치나 순위가 아닌, 코로나19 위기에서 벗어날 때 제대로 경기가 반등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활력을 더할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국제기구들이 재정 여력이 있다고 말한 점, 지난해 한국의 성장률 충격이 덜했다는 점에 방점을 찍을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기업들이 그토록 바라는 규제 완화처럼 돈이 안 드는 경제 활성화 방안도 있는데, 재정 건전성 훼손이 부담되는 현재 경기 부양을 돈 들여서만 할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돈을 덜 쓰고도 경기를 부양할 수 있는 방법', 즉 기업을 지원하고 규제를 푸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는 전 이사장이 지금의 정부 대응에 가장 크게 우려하는 점은 재정만능주의다. 지난해 전례 없는 수준의 통화ㆍ재정정책이 불가피하긴 했지만, 대규모 재난지원금이나 정부 주도의 공공일자리, 한국형 뉴딜 등 돈을 푸는 방식으로만 대응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돈을 풀기만 하는 정책으로는 경제 활력을 떨어뜨리고, 젊은 층들이 주식과 같은 위험자산 투자에만 몰리는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그는 12년 전 금융위기 극복을 상기하며 "당시에도 초동 대응에선 정부가 필요했지만 재활 과정에선 민간이 경기를 주도하도록 했다"며 "정부가 민간의 역할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정부 주도의 산업 키우기는 민간 주도의 경기 활성화를 절대 따라갈 수 없다고도 했다. 민간 일자리가 늘며 20~30대 청년층 고용ㆍ부동산 문제가 해결돼야 결혼을 할 수 있고, 국가미래 비전이 보여야 출산율도 올라간다고 지적했다. 전 이사장은 "정부가 자꾸 디딤돌을 놓으려고 하는데, 정부의 역할은 오히려 걸림돌을 치우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다음은 전 이사장과의 일문일답.

"정부, 돈 더 써도 괜찮다는 말만 들어선 안 돼"

-작년 한국 경제성장률(-1.1%ㆍ한국은행 전망치)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선 1위라고 한다.

▲OECD 국가들 중에 선방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정부가 내세우는 게 맞을까. 성장률이 선방한 배경에는 반도체ㆍ자동차 등 우리나라 핵심 대기업이 코로나19 특수를 누린 요인들이 컸다. 작년 성장률이 덜 떨어졌으면 올해 반등 폭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고, 작년과 올해 연평균 약 1% 성장에 그칠 것이다. 위기 때 단기적으로 성장률이 오르고 내리는 데 너무 민감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올해 반등 폭이 다른 나라보다 작다면, 우리 경제는 왜 탄력성이 떨어지는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국가채무가 늘어나는 가운데 정부는 '한국형 재정준칙'을 내놓았다.

▲재정 건전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런데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2025년부터 적용하겠다고 제시한 타이밍이다. 그땐 다른 정부가 들어설 텐데, '다음부터' 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또 다른 문제는 위기 시 예외 조항이다. 아무리 좋은 규정을 만들어도 지키려 하는 의지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를 봐도 그렇다. 3단계 기준을 만들어뒀는데 2.5+알파(α)로 거리두기 단계를 계속 조정하고 있다. 거리두기 격상이 경제에 부담되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미리 기준을 만들어 둔 것인데 안 지키면 과연 재정준칙이라고 지켜질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제기구들은 우리나라의 재정 상태가 괜찮다고 한다.

▲세계은행(WB)에서 15년 가까이 일했지만 국제기구의 생리는 세계 주요 이슈를 파악한 뒤 큰 틀에서 제안을 하는 것이지, 개별국의 입장을 반영했다고 보긴 어렵다. 독일ㆍ한국 재정 형편이 괜찮으니 돈을 더 쓰라는 얘기는 상황을 잘 모르고 하는 얘기거나, 알면서도 큰 틀을 위해 하는 얘기다. 재정적자/국내총생산(GDP) 비율이 오르는 속도도 우리나라는 빠르다. 이미 고령화로 복지 지출이 늘며 장기 재정 전망이 더 나빠지는데 국제기구 발언을 들며 돈을 더 갖다 쓰는 구조로 간다는 건 문제다. 국가 미래를 생각하고 미래 세대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알아서 하는 것이지, 국제기구가 하는 게 아니다. 국제기구의 정책 자문에 숨겨진 중요한 말들, 한국은 규제ㆍ노동개혁으로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얘기는 수년째 담겨 있다. 오히려 이 부분이 우리가 진짜 들어야 하는 얘기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이 아시아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문호남 기자 munonam@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푼 돈이 자산시장 쏠림현상만 키웠다는 지적도 있다.

▲실물과 금융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은 과거 위기와 비교해도 이렇게까지 벌어진 적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젊은 사람들의 위험자산 투자가 눈에 띌 정도로 심한데, 이를 정부나 정치권이 좋은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게 문제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동학개미가 증시를 지켰다"고 발언했는데, 디커플링 위험이 나타나는 시점에서 시장에 이런 코멘트를 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경기가 회복되는 시점이 오면 유동성을 흡수하며 조정이 올 수 있는데, 그땐 책임 이슈까지 나올 수 있다.

-주택 매매가격이나 전셋값 문제도 심각하다.

▲정부가 수요-공급 문제와 같은 기본적 부분을 인식하기를 바란다. 시장 가격을 주물러 조정하겠다는 인식 자체가 잘못됐다. 시장 매커니즘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값이 오르는 것은 분명 수요가 있는 것. 그 부분을 찾아 공급을 늘리는 등 시장 매커니즘을 1차적으로 고려한 후 정부가 미세 조정하거나 규제해야 한다. 규제부터 하니 풍선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기업 먼저 키워야 결혼ㆍ출산문제도 해결"

-누적된 민간부채도 문제다. 코로나19 이후 양산된 한계기업들이 금융시스템을 흔들 가능성과 한계기업을 조기 청산할 필요는 없는가.

▲어려운 문제다. 금융위기 이후에도 그랬는데, 현장에선 위기가 진행되는 중에 '지속 가능한 기업'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기업 옥석을 가려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반적 경제 활력을 회복시키는 게 한계기업 자생력을 회복시키는 지름길이라고 본다. 금융지원으로 링거주사 바늘을 꽂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수한 산업구조를 보면 대기업-하청기업이 연계돼 있어 대기업이 살아나야 다른 기업도 살아난다. '대기업은 모두 나쁜 곳'이라는 식의 접근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업지원책을 내놓고 규제 완화를 통해 경제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금융지원보다 더 필요할 것 같다. 대표적인 게 52시간 제도나 공정경제 3법 보완이다.

-정부가 '한국판 뉴딜'로 신산업을 육성하고, 유동성을 생산적인 곳으로 흐르게 하겠다고 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디지털, 첨단 기술력으로 승부하는 시대다. 1930년대 인프라 투자를 위한 '뉴딜'이란 이름은 차치하고서라도, 정책을 주도하는 운전자가 정부가 된다는 것은 매우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정부 관료들 중에는 똑똑한 사람도 많지만 해당 분야의 민간기업보다 앞서갈 순 없다. 핵심기업들이 뛸 수 있게 하되, 이 과정에서 중소ㆍ중견기업이 위축되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게 상생이다. 상생협력이 대기업 발목을 잡아 비슷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일자리는 민간기업과 혁신산업에서 만들어야 하는 부분이다. 현 정부 들어 공공일자리가 많이 늘었는데 이런 일자리는 정부가 자랑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세금 부담이다. 해외투자자들도 공공 부문 일자리를 만드는 나라엔 투자 매력을 못 느낀다.

-낮은 출산율은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우려된다.

▲잠재성장률을 구성하는 자본, 노동력, 총요소생산성 중 노동력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노동력을 양(생산가능인구 증가)과 질(노동개혁)로 나눠보자. 지원금이 출산율에 도움은 되지만 근본적 해결방법은 아니다. 일자리나 집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결혼ㆍ출산을 할 리가 없다. 최선의 저출산 대책은 국가경제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다. 질적 노동력을 보면 생산성을 높일 '적절한 인센티브 지급 환경 조성'이 답일 것 같다. 무리하게 해고를 하라는 얘긴 아니고, 인센티브가 충분해야 사람들의 능률이 올라간다는 뜻이다. 글로벌 기업들과 싸워야 하는 기업들을 공공기관처럼 일하게 하면 안 된다.

-재난지원금이나 기본소득이 핫이슈다. K자형 회복 때문에 취약계층 지원을 없애긴 어렵다.

▲무조건 선별적 지원으로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에스테르 뒤플로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보편ㆍ선별적 지원을 결정할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나라가 '선별적 지원을 할 통계가 갖춰진 나라인가'라는 점이다. 한국은 그 기반이 충분한데 정치ㆍ행정적으로 편하다고 해서 지원금을 전체적으로 뿌려선 안 된다. 쓸 데가 많아지니 세금을 더 걷자는 사고도 위험하다. 조세원칙의 기본은 '세원은 넓히고 세율은 낮추는 것'인데, 지금은 거꾸로 가고 있다. 세금을 늘리는 논의보다는 '돈이 안 들면서도 경기를 활성화시킬 방안은 뭐가 있는지' 고민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이 아시아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전 이사장의 집무실에는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등과 전 이사장이 함께 찍은 사진들이 놓여 있다. /문호남 기자 munonam@

"세계경제 회복되지만 불확실성… K자형 회복 혼재될 것"

-올해 세계경제가 작년보단 나아질 것으로 보는 예상이 많다. 회복 시점과 긍정ㆍ부정 요소는.

▲긍정적 측면은 아무래도 코로나19 백신효과다. 상반기에 백신 접종이 활발히 이뤄지면 본격적 회복세는 하반기는 돼야 나타날 것이다. 미국이 경기부양책을 지속하는 점도 거시지표를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 다만 나라별로 백신 확보 수준이 다른데 우리는 불행히도 후자 쪽이라 격차가 클 수 있다. 코로나19 재확산에 변이까지 나오고 있다는 점도 하방리스크다. 세계경제 회복은 어떤 형태가 정해져 있다기보단 'K자 회복'이 언제든 공존하는 형태가 될 것 같다. 국가ㆍ산업ㆍ소득ㆍ계층별로 혼재된 모습 아닐까.

-가장 큰 변수를 꼽는다면.

▲K자 형태 회복에서 발생할 신흥국 리스크가 있다. 신흥국 리스크 형태도 두 가지인데, 첫째는 코로나19 충격이 워낙 커서 디폴트 위험이 생긴 나라들(인도ㆍ남미 국가)이다. 두 번째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채를 부담하고 있는 나라들의 리스크다. 잠비아, 스리랑카, 파키스탄 등이 중국의 일대일로(육상ㆍ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자금을 빌렸다.

-바이든 미국 행정부 이후 수출전망과 우리 정부가 취할 포지션은.

▲수출 전망이 나빠지진 않을 것 같다. 원화 강세 우려가 있지만 최소 저항선은 지킬 것이란 기대감이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자유무역, 다자주의에 우리도 잘 적응해야 할 것 같다. 중국 주도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뿐 아니라 미국 주도의 포괄적ㆍ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까지 다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눈치 보길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줄타기보다 우리 원칙에 맞게 해야 한다고 본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안보가 선행돼야 우리 경제도 있는 것이다. 자유동맹 일원으로서 안보를 우선순위로 하고 국제질서인 자유무역 근간을 준수하는 게 큰 이슈인데. 이 부분을 당당하게 해야 대접도 더 받는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목소리를 제대로 낼 필요가 있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에서 우리가 중요한 입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은별 기자 silverstar@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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