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파비우스의 인내

오스트리아 비엔나 쇤부른궁전에 위치한 파비우스 막시무스 석상의 모습[이미지출처=오스트리아 쇤부른궁 박물관 홈페이지]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강대한 적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철저히 수성, 봉쇄작전으로 적의 군사력을 고갈시키는 지구전을 영어로 '파비우스 전략(Fabian strategy)'이라 부른다. 여기서 파비우스는 고대 로마에서 나라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한 명장인 파비우스 막시무스 장군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파비우스 장군은 로마의 숙적이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로마를 멸망 위기로 몰아세웠던 기원전 218년,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군의 총사령관이었다. 한니발이 로마군을 연전연패시키며 기세를 떨치는 동안 파비우스 장군은 철저히 봉쇄작전으로만 일관했다. 파비우스의 전략은 한니발군이 쳐들어오면 성에서 방어에만 집중하고, 적의 수송로로 사용될 수 있는 도로와 항구도 모두 폐쇄하며 성 밖의 모든 농가와 상점들은 문을 닫는 전략이었다.

그의 강력한 봉쇄조치는 전면전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한니발을 고사시키기 위한 전법이었지만 로마 시민들에게도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는 작전이었다. 성 밖의 자신의 농토와 상점이 한니발군에 의해 약탈당하는 것을 바라만 봐야 하는 로마 시민들은 봉쇄조치 장기화에 경제난이 가중되자 불만이 폭증했다. 로마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굼뜨고 무능한 인간이란 뜻의 '콘크라토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한니발 또한 이러한 로마의 민심을 파악하고, 성 밖의 파비우스 장군 소유의 농장들은 훼손치 않고 그대로 두는 계략을 썼다. 또한 첩자들을 파견해 파비우스가 카르타고와 내통한 것처럼 소문을 내자 로마 시민들의 불만은 폭발하고 말았다. 결국 로마 원로원은 그를 1년 만에 총사령관직에서 파면시켜버렸다.

이후 강경파 장군들이 장악하게 된 로마군은 한니발과 기원전 217년 칸나에 전투에서 결전을 치렀고, 여기서 로마군이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면서 로마는 멸망직전의 위기에 놓였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파비우스 장군을 다시 총사령관직에 복귀시켜 로마의 운명을 맡겼다. 파비우스 장군은 자신을 밀어내고 출정했던 패전장수들을 직접 위로하며 복귀해 13년간 기존의 봉쇄전략 원칙대로 작전을 꿋꿋이 이어나갔다.

13년 뒤 한니발의 이탈리아 원정군은 군세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며 고사 직전에 처했고 파비우스 장군은 드디어 반격명령을 내린다. 스키피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은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해 한니발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하고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파비우스 장군은 한니발이 로마에서 물러나고 일주일 뒤에 과로로 숨졌다. 이에 따라 앞서 로마시민들이 그에 대한 멸칭으로 붙인 콘크라토르의 의미도 바뀌게 됐다. 콘크라토르는 국익을 위해 그 어떤 비난도 콘크리트 벽돌처럼 견뎌내는 위정자의 인내심을 일컫는 말이 됐고, 후대에도 중요한 교훈으로 남게 됐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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