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의 가을귀]기괴한 웃음의 가면, 그 뒤엔 자유와 신념

앨런 무어·데이비드 로이드 '브이 포 벤데타 30주년 기념 디럭스 에디션'

총살형을 앞둔 이비 해먼드(나탈리 포트만). 독방 한가운데 웅크리고 앉아 죽음을 기다린다. 이윽고 열리는 차가운 철문. 정장 차림의 남성이 들어와 말을 건넨다. "시간이 됐다." "준비됐어요." "상부에서 원하는 건 약간의 정보야. 아무 정보나 줘." 해먼드는 미동조차 없다. "말은 고맙지만, 창고 뒤에서 죽겠어요." "두려움이 사라졌군. 넌 자유다."

철문을 열어두고 사라지는 남성. 해먼드는 살금살금 복도로 나온다. 조심스레 출구로 보이는 문을 밀고 들어간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위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익숙한 공간이다. 해먼드가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소재를 함구한 브이(휴고 위빙)의 저택. "어서 와. 이비." "당신이 그랬어. 내 머리를 밀고 날 고문했어. 날 고문했다고! 왜죠?" "두려움 없이 살고 싶다고 했잖아. 그 방법뿐이었어."

영화 '브이 포 벤데타(2005)'에서 해먼드가 두려움을 떨치고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극의 분위기가 한순간 반전되는데, 이어지는 대화 장면은 평이하게 나타난다. 브이가 해먼드를 설득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졌다. 바스트 샷과 웨스트 샷이 주를 이루고, 내부 조명 또한 부드럽고 따뜻하다. 해먼드의 심리 변화를 간소화한 느낌을 준다. 그의 변천사가 곧 브이의 과거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쉬움이 남는 연출이다.

앨런 무어가 쓰고 데이비드 로이드가 그린 동명 원작 만화는 빛과 어둠의 대조로 해먼드의 복잡한 심리를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해먼드가 역정을 내는 장면을 다양한 각도에서 비추는데 특히 그의 과거가 언급되는 순간부터 브이를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처럼 표현한다.

해먼드가 브이의 품에 안겨 "마치 천사가 된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스포트라이트도 활용한다. 그래서 브이가 의식의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뻗어 올라오는 한 줄기 빛처럼 나타난다. 연민의 감정과 뜻이 통하는 동병상련의 동지애로 방안 전체를 채운다. "우리의 문이 열린 게야, 이비. 지금 느끼는 건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네. 두려워하지 말게."

'브이 포 벤데타'가 다루는 핵심은 이면(裏面)이다. 핵전쟁 발발 뒤 영국 사회를 통제하는 전체주의 정부의 그것과 낭만적이면서도 강인한 무정부주의자 브이의 그것을 동시에 조명한다. 무어는 초안부터 브이의 얼굴을 하얗게 분칠한 인형으로 설정했다. 로이드는 그걸 어떻게 표현할지 고심하다 문득 가이 포크스를 떠올렸다. 1605년 11월 5일 의회 의사당 폭파로 잉글랜드의 왕과 대신들을 한꺼번에 몰살시키려 했던 화약 음모 사건의 주동자다. 로이드는 무어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주인공에게 종이 반죽 가면을 씌우고 망토와 원뿔 모자를 더해 가이 포크스의 환생처럼 꾸미면 어떨까. 진짜 기괴해 보이겠지만, 원래 포크스라면 마땅히 그런 이미지여야 하잖아. 매년 11월 5일이 되면 그 친구 인형을 태울 게 아니라, 의사당 폭파를 시도했던 그를 기념해야지!"

포크스의 웃는 얼굴은 처음부터 '혁명의 미소'가 아니었다. 테러범을 조롱하는 의미가 더 강했다. 하지만 이 만화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세계 전역의 시위자들은 브이를 자처하며 포크스의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혁명의 출발은 각성이다. 극한의 고통을 견디고 스스로 압제의 사슬에서 해방돼야 한다. 브이는 그 결과가 혼돈일지라도 자유를 잃고 전체에 순응하는 사회는 어떤 비극으로 치달았는지 이미 역사가 말해주지 않느냐고 역설한다.

항변하는 얼굴은 기괴한 미소를 띤 가면 뒤에 숨겨져 있다. 브이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해답은 브이와 비슷한 고통을 겪으며 각성한 해먼드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해먼드 또한 자유와 신념, 저항과 해방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물으므로. 브이는 또 다른 자신에게 말한다. "이 망토 안의 존재는 피와 살로 이뤄져 있지 않다네. 있는 것은 오직 신념뿐."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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