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진기자
[아시아경제 최석진 기자] 열악한 근로환경 때문에 태아의 건강이 손상돼 산모가 선천성 질병을 가진 자녀를 출산한 경우 이는 산모의 업무상 재해에 해당돼 산재보험금 지급 대상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태아의 건강 손상이나 출산아의 선천성 질환이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에 포함되는지 여부에 대해 대법원의 판단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29일 제주의료원에서 근무했던 간호사 A씨 등 4명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급여신청 반려 처분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임신한 여성 근로자에게 그 업무를 이유로 발생한 '태아의 건강손상'은 여성 근로자의 노동능력에 미치는 영향과 관계없이 산재보험법 제5조 1호에서 정한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에 포함된다"고 이유를 밝혔다.
이어 “임신한 여성 근로자에게 그 업무에 기인해 모체의 일부인 태아의 건강이 손상되는 업무상 재해가 발생해 산재보험법에 따른 요양급여 수급관계가 성립됐다면, 이후 출산으로 모체와 단일체를 이루던 태아가 분리됐다 하더라도 이미 성립한 요양급여 수급관계가 소멸된다고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제주의료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인 원고들은 모두 2009년 임신해 유산 징후 등을 겪은 뒤 이듬해 아이를 출산했는데 4명의 아이 모두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채 태어났다.
당시 제주의료원은 노동 강도가 높을 뿐 아니라 불규칙한 교대 근무, 부족한 인력 등으로 이직률이 높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입원환자 대다수가 70세 이상의 고령이라 알약을 삼키지 못할 경우 간호사들이 가루로 분쇄하는 작업을 했는데, 임산부와 가임기 여성에 금지된 약들도 분쇄 대상에 다수 포함됐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 때문인지 당시 제주의료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중 원고들을 포함해 모두 15명이 임신을 했는데 이중 6명만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고, 4명이 선천성 심장질환아를 출산하고 다른 5명은 유산한 것으로 확인됐다.
결국 선천성 심장질환아를 출산한 원고들은 임신 초기에 유해한 요소들에 노출돼 태아의 심장 형성에 장애가 발생한 것이므로 선천성 심장질환아 출산은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하지만 공단은 “업무상 재해는 근로자 본인의 부상·질병·장해·사망만을 의미하고 근로자의 자녀는 산재보험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로 볼 수 없다”며 요양급여를 지급할 수 없다는 처분을 내렸다. 이에 원고들은 법원에 공단의 이 같은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재판에서는 당시 병원의 열악한 근로 환경이 태아들의 선천성 질환과 인과관계가 인정되는지, 산재보험법의 적용 범위에 태아가 포함되는지 등이 쟁점이 됐다.
하급심의 판결은 갈렸다.
1심은 원칙적으로 모체와 태아는 단일체이며 태아에게 미치는 어떤 영향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법적 권리·의무가 모체에 귀속되는 만큼, 임신 중 업무로 태아에게 생긴 건강손상은 산모인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로 봐야된다고 판단, 원고 승소 판결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산모인 근로자가 업무상 입은 재해로 질병을 가진 아이를 낳았더라도 이는 근로자 자신의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요양급여를 받을 권리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원고 패소 판결했다.
대법원은 결과를 다시 뒤집었다.
최석진 기자 csj0404@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