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화기자
[아시아경제 김종화 기자]도심에 신호등이 갑자기 멈추면 혼란이 오겠지요. 그러나 없앤다고 알린 후 없애면 혼란은 줄어들지 않을까요? 공사로 한 구간이 막히면 인근의 도로 전체가 마비되지만 미리 공사를 알리면 우회하는 차량들이 있어서 교통체증은 좀 덜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신호등을 없앤다고 알린 후 신호등은 물론 도로 표지판 등을 아예 없애 버렸더니 오히려 교통사고가 줄어든 도시가 있습니다. 독일 니더작센 지방에 위치한 작은 도시 '봄테(Bohmte)'는 신호등 대신 운전자들이 스스로 '조심운전' 하도록 해 교통사고가 거의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2007년 9월 봄테시에서 신호등을 없애기 전까지 이 소도시는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은 매일 교통지옥을 경험하는 도시 가운데 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자전거 이용자가 많은 독일 거리의 특성상 비좁은 왕복 2차선 도로 곳곳은 보행자와 자전거 이용자, 각종 차량이 뒤엉켜 베트남이나 중국의 어느 거리 못지않은 혼돈을 연출했다고 합니다.
봄테시에 신호등이 없어진 계기는 유럽연합(EU)에서 추진한 '쉐어드 스페이스(Shared space, 공유공간) 프로젝트'가 출발점입니다. 쉐어드 스페이스는 네덜란드의 교통공학자 한스 몬더만의 제안에서 시작됩니다. 몬더만은 보행자의 안전과 차량 통행의 원활함을 만들어진 각종 교통 표지판이 오히려 운전자들의 배려심을 없애고, 방심을 유발해 더 많은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몬더만의 제안에 따라 EU는 유럽 각 도시를 대상으로 실험에 나섭니다. 2003년 네덜란드 북서부의 소도시 드라흐텐(Drachten)을 시작으로 영국 런던의 켄싱턴은 일부 지역에 쉐어드 스페이스를 도입하고, 독일의 봄테는 2007년 도시 전역을 대상으로 전면 시행하게 됩니다.
봄테시는 신호등과 인도를 없애고 도로 바닥에 그려진 각종 노상표지도 모두 지워버립니다. 봄테시 당국은 신호등을 없애고 노상표지를 지워버리면 운전자들이 평소와 다른 환경에 불안함을 느껴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시 관계자는 "운전자가 좀 더 헷갈리기를 바랬다"고 할 정도로 운전자에게 한치의 양보도 없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도로를 만듭니다.
반면, 도로 한 중간만 아니면 운전자들은 아무 곳이나 주차할 수 있고, 교통법규도 딱 속도제한과 무조건 양보 등 두 가지만 남겨 두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요? 좁고 중앙선 표식도 없는 도로를 주행하는 운전자들은 극도로 긴장했습니다. 도로 양옆으로 붙어 조심스럽게 운전했고, 속도도 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로에 아무런 표지가 없는 만큼 운전자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어 양보운전과 배려운전을 실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시행 첫해 전년보다 교통사고 건수는 몇 건 더 늘었지만 피해 정도는 훨씬 줄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봄테에서는 사망자가 나올 정도의 심각한 교통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고, 사고도 거의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줄었다고 합니다.
다른 도시는 어떨까요? 도심 전체가 아닌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했음에도 네델란드의 드라흐텐에서는 사고 발생률이 낮아졌고 교통흐름은 40%나 개선됐습니다. 복잡한 쇼핑거리에 쉐어드 스페이스를 도입한 영국 런던의 켄싱턴도 보행자 사고가 60%나 감소했습니다.
사고가 줄어든 봄테시의 경제적 효과는 어느 정도일까요?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분석에 따르면, 200여만 개 교통표지판 중 3분의 1만 줄여도 우리 돈으로 2조4000억 원 가량, 신호등의 3분의 1만 없애도 1조8800억 원 정도를 절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전기요금만 매년 536억 원을 절약할 수 있고, 신호대기와 지정체 시 발생하는 경제적 비용도 절감됩니다.
봄테시의 정책이 효과를 거두자 EU는 쉐어드 스페이스 도시를 점점 더 넓혀가고 있고, 호주와 캐나다 등에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커뮤니티 도로, 영국은 홈 존, 독일은 템포 30존, 호주는 쉐어드 스페이드 등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쉐어드 스페이스 프로젝트의 핵심은 자율입니다. 규제하는 대신 사람과 차, 도로와 주변 환경을 연결해 서로 소통하고, 신호만 믿고 방심하지 않고 주위를 살펴 책임있게 행동하는 새로운 윤리를 요구한 것입니다. 공간의 성격과 사람들의 행동방식마저 바꾼 것입니다. 쉐어드 스페이스 성공의 열쇠는 결국 '조심운전', '배려운전'이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가능할까요? 몇 년전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와 경찰청 등이 국내 일부 지역에 '무신호 구역' 설치를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단지 신호를 없애는 것이지만 아직 도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작 도심지의 차량 운행속도를 더 낮춘 것만이 유일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까요? 유럽처럼 쉐어드 스페이스 도입은 먼 날의 이야기입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도 '도시재생'이 본격화 되면서 도로가 교통을 위한 것이 아닌 생활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과 제도개선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공유공간을 넘어 '공유도시'로 그 개념이 점점 확대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규정속도를 지키지 않고, 달릴 수만 있다면 과속하는 운전자와 운전대만 잡으면 욕쟁이가 되는 운전자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제 시행착오를 무릅쓰고 쉐어드 스페이스를 도입해 보면 어떨까요? 혼란을 각오하고서라도 쉐어드 스페이스에서의 사고는 보험처리에서 불이익을 볼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것은 어떨까요?
차를 두려워 하지 않는 보행자, 보행자를 무시하는 운전자가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쉐어드 스페이스가 우리나라에도 하루빨리 도입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교통 규칙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면, 자율에 맞겨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