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뜻도 모르고 읽는 책/심재휘

처음 가 보는 바닷가였는데해변의 여관방에 자리를 깔고 누웠더니그곳에는 어두울수록 잘 읽히는 책이 있었다밑줄을 칠 수도 없고귀를 접을 수도 없는사실은, 읽어도 뜻을 알 수 없는 책그 옛날 고향의 순긋해변에 가면무허가 소줏집에 가면레코드판을 따라 돌아가던 노래아껴 듣던 그 노래를 생각하는 밤이었는데노래를 따라서 도는 참 이상한 책이었다노래는 시들고 소줏집은 철거되고그러다가 몸은 누워 잠이 들었는데그토록 지루해도 페이지가 넘어가는 책이었다똑같은 소리가 밤새 계속되는 것 같아도잘 들으면 매번 다른 소리를 내어서잠들기 전에 소리를 세는 가련한 밤이었다나는 그 책을버리지 못하고 들고 온 모양이라오늘은 그 먼 바닷가가곁에 와 함께 눕는 밤이다뜻도 모르고 다만사전에도 없는 그 순긋한 소리에 빠져뜻도 모르고
■이 시를 쓴 시인에겐 좀 미안한 말일 수도 있겠는데, 이 시를 읽다 보면 한국 시의 절경들 가운데 하나인 백석이 쓴 '흰 바람벽이 있어'가 괜스레 겹쳐 떠오른다. 한마디로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 그런데 이 시는 바로 앞 문장에 "사전에도 없는" 말 하나를 슬쩍 더 얹는다. '순긋하다'가 그것이다. 이 말이 비롯된 '순긋해변'은 강릉에 있다고 하니 그쪽 사람들은 대번에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나는 "뜻도 모르고 다만" 짐작만 할 따름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짐작할 도리마저 없어 그저 이 시를 읽고 다시 읽으면서 '외롭고 높고 쓸쓸한' "옛날 고향" 집 골목길 초입에 있던 이름도 없는 소주 파는 집을 떠올리면서 '순긋하다'라고 자꾸 되뇔 뿐이다. 채상우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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