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노믹스, 獨서 배운다] 독일의 실리콘밸리 '아들러스호프'를 가다

'일에서의 과학(Science at work)' 지향하는 과학산업단지

독일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과학기술단지 '아들러스호프' 전경.

[아들러스호프(독일)=아시아경제 명진규 기자] 이른 아침 구 베를린 시가지에서 도심 외곽으로 나가는 지상철 S반에 몸을 실었다. 20여분 정도 지나자 주택가도 사라지고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출근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도시 외곽으로 나가는 S반에는 백팩을 맨 남녀로 가득찼다. 여의도의 약 1.4배 정도인 4.2㎢의 작은 면적에 총 1013개의 기업과 훔볼트대학 공대 연구소를 비롯한 16개의 연구기관이 빼곡히 들어찬 아들러스 호프로 가는 길이다. 아들러스 호프는 구 동독에 속했던 지역으로 현재는 독일을 대표하는 과학산업단지중 하나다.한산한 주택가가 20여분 정도 이어진 뒤 넓은 평원이 나타났다. 곧 도착하는 아들러스호프 역 쪽을 바라보자 현대식 건물들이 가득하다. 역 하나를 사이에 두고 풍경이 이렇게 다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들러스호프 역에 내렸다. 독일에서 가장 큰 산업과학단지 '아들러스호프'안으로 들어서자 '일에서의 과학(Science at work)'라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다.

'일에서의 과학(Science at work)'라는 현수막이 '아들러스호프'의 지향점을 상징한다.

아들러스호프의 관리와 행정을 담당하는 비스타사(社)의 커뮤니케이션 총괄 담당 피터 스트렁크 박사는 "순수 과학에서 일과 결합된 과학단지가 아들러스 호프의 지향점"이라며 "첫째도 일자리, 둘째도 일자리라는 생각을 갖고 1991년 설립 이후 발전해 온 아들러스 호프트는 독일의 '히든 챔피언'의 산지"라고 말했다.그도 그럴듯이 이 작은 곳에 15만996개에 달하는 일자리가 있다. 훔볼트 공대와 관련 연구소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수만 6524명에 달한다. 연간 매출은 18억 유로에 달하지만 정부 지원액은 약 3000만 유로에 불과하다.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물들 속에는 평균 종업원 수가 수십명에 불과한 전형적인 독일 중소기업들이 모여있다. 이곳에 기업들이 입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베를린 시내와 전철로 30여분 거리면서 사무실 임대료가 시내에 비해 25~30% 정도에 불과하다. 단지 전체의 행정을 책임지는 비스타사(社)가 관리하며 서로 시너지를 낼 만한 기업들을 찾으면 비즈니스 미팅을 주선해주고 각종 행정업무들을 서비스해준다.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베를린 인근에만 총 12개의 산학단지가 자리잡고 있다.단지 내부를 걸어보니 모든 도로가 사람 이름이다. 노벨상 수상자 등 과학자들의 이름을 붙여놓았다. 광학, 태양광을 비롯한 재생에너지, 마이크로 시스템, IT 및 미디어, 생명공학, 애널리틱스 분야 기업들이 모여있다. 대부분이 연구개발(R&D) 위주의 전문 기업들이다. 바이오 연료 개발 업체인 알제놀사의 경우 전체 인력이 연구원이다. 이중 일부는 훔볼트대 박사과정 학생이라는 얘기에 자세히 물어보니 이 회사 관계자는 "기업이 대학에 관련 연구를 의뢰하고 연구에 고용된 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구 동독 시절 극비 화학, 물리 실험을 했던 '볼 연구실'. 지금은 구 동독 시절의 유물로 남아있다.

건물들 사이에 눈에 확 띄는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2개의 큰 콘크리트 볼이 연결돼 있다. 창문도 없고 외부에 있는 입구 하나가 유일한 건물이다. 구 동독 시절의 유물인 '볼 실험실(Ball Laboratory)'로 아들러스호프의 역사의 산증거 중 하나다. 아들러스호프는 1754년 농장으로 시작돼 1900년대 초 항공기 기술 개발의 발상지였다. 2차대전 후에는 동독 과학 R&D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이곳에는 구 동독 물리ㆍ화학 연구소가 있었다. '볼 실험실'은 초정밀 물리, 화학실험을 위해 만들어졌다. 125㎝ 두께의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볼은 완벽한 구체로 연구실 중심에서 실험을 할 경우 어느쪽 방향서도 천정, 벽과 같은 길이를 갖게 된다. 때문에 건물내 온도 변화가 균일하다. 장기간 온도 안정성이 0.01도 수준의 실험실을 갖춰야 할 필요가 있어 만들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각종 실험이 진행됐는데 구 동독시절 철저하게 비밀리에 관리 됐다고 한다. 통일 독일 이후에도 관련 실험 자료는 모두 극비로 분류됐다.지금은 사용되지 않는다. 워낙 두꺼운 콘크리트로 만들어 내부 실험실이 협소하고 창문도 비상구도 없는 만큼 위급상황이 발생할 경우 밖으로 빠져 나오기 어려워 폐쇄한 뒤 관광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훔볼트 대학 연구소 옆에는 더 기괴한 건물이 있다. 마치 달걀을 닮은 듯한 '윈드 터널'이 그것이다. 이곳 역시 구동독 시절의 실험실로 항공 역학을 연구한 곳이다. 건물 내부에서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기류를 분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자동차 엔진의 연료 소비량, 배기 가스, 소음, 진동, 온도 변화 등을 연구하며 엔진 기능과 내구성을 검사한 곳이다. 구 동독 과학자들이 이곳에서 한 실험들은 모두 기밀로 분류됐다고 한다. 서독에 비해 산업화에선 뒤졌지만 과학기술 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점을 방증한다.독일 통일 직후 구 동독 지역들의 경제가 급격히 붕괴되면서 아들러스호프 역시 대량 실업의 위기에 처했다. 당시 총 5600명의 구동독 과학기술자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1991년 베를린 주정부가 사이언스시티를 설립했다. 스트렁크 박사는 "최고의 두뇌들이 겪게 될 대량 실업사태를 막기 위해 생긴 것이 아들러스호프"라며 "당시 서독과 동독은 서로의 기술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만큼 이들을 활용해 새로운 산업을 만들자는데 합의했고 동시에 관련 연구소와 기업들을 대거 유치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IT 및 미디어 산업도 아들러스호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총 1013개의 기업 중 140여개가 미디어시티에 속한 방송제작 관련 업체들이다. 과거 구 동독시절 이곳에서는 정치선전 방송을 송출하는 방송국들과 관련 제작 업체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그 유산을 이어받은 것이다. 16개의 연구기관 중 6개는 훔볼트 대학의 부설 연구소로 물리학, 화학, 수학, 컴퓨터공학, 지리학, 심리학 연구를 진행한다. 나머지 10개는 라이프니츠 촉매연구소, 연방재료시험연구원, 헬름홀츠 재료에너지센터, 국립물리기술연구원 등으로 기초과학부터 응용과학을 모두 연구한다.이 외 주요 지원기관으로는 기술기반 스타트업 기업을 지원하는 베를린혁신센터(IZBM), 단지 내 용지 매각 관련 업무를 지원하는 아들러스호프 프로젝트사(APG) 등이 있다.명진규 기자 aeo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산업부 명진규 기자 aeo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