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별 뉴욕 특파원
[아시아경제 뉴욕 김은별 특파원] 요즘 뉴욕 맨해튼 센트럴파크 중앙에 위치한 야외 공연장 '델라코테 극장(Delacorte Theater)' 앞에는 아침부터 긴 줄이 늘어선다. 공원 공식 입장시간인 오전 6~7시부터 이미 줄을 선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쩍 더워진 날씨 덕에 햇볕이 따가운데도 줄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바로 여름을 알리는 뉴욕의 명물 '퍼블릭 시어터'의 무료 연극을 보기 위한 사람들이다. 비용이 들지 않는데다 초여름 날씨를 함께 즐길 수 있어 극장은 늘 관객들로 꽉 들어찬다. 매년 셰익스피어 작품 중 두 작품을 선별해 무대에 올리는데, 최근엔 '율리우스 시저'가 올랐다.매년 인기를 끄는 이 공연이 최근엔 또 다른 이유로 미국의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연극의 주인공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이 연극은 '현대판 시저'를 그리고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길고 덥수룩한 금발머리에 검은색 정장 차림, 허리벨트를 덮는 빨간 색의 긴 넥타이를 맨 시저가 등장한다. 시저의 부인은 칼푸르니아 역시 키가 큰 금발여성으로 슬라브어 억양을 쓴다. 누가 봐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영부인 멜라니아 트럼프를 연상시킨다. 문제는 '시저'가 잔인하게 암살되는 장면이다. 극중 상원 의원들에 의해서 암살되는데, 암살 장면에서 미국 국기도 함께 휘날리고 있어 트럼프 대통령임이 거의 확실시된다. '표현의 자유'라는 주장과 '너무 지나쳤다. 미국이란 국가의 대통령을 조롱한 것'이라는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 계기다. 사실 이 연극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예술계에서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됐고, 트럼프 지지자들이 반발하자 급기야 대기업들이 극단 후원을 끊으면서 갑자기 논란이 커졌다. 델타 항공은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연출이 건전한 취향의 경계를 넘어섰다"며 "스폰서십을 당장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11년간 극단을 지원한 뱅크오브아메리카도 후원을 끊었으며, 아메리칸익스프레스는 본인들의 후원금이 시저 연극에는 지원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반면 극단을 지지하는 견해도 많다. 뉴욕시 감사원장 스콧 스트링어는 델타와 뱅크오브아메리카에 편지를 보내 "문학작품의 표현을 제한하는 결정은 잘못된 메시지를 준다"며 비판했다. 논란은 일반인들에게까지 번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이 연극을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설전을 벌이고 있다. 단순히 연극 시작 전 와인 한 잔과 함께 '인증샷'을 남긴 사진에도 "부끄러운 줄 알라"며 댓글이 달리고 그 글은 싸움장으로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논란은 내게 크게 부정적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연극을 본 지인들에게 "누가 맞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본 뒤 더 확신하게 됐다. "답은 없다. 이런 일이 워낙 자주 있으니 놀랍지도 않다"며 웃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문화를 즐기고, 그에 따르는 정치 담론을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장이 마련되는 것만으로도 민주주의가 한 발 내딛는 계기가 되는 것 아닐까. 한국도 지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문화예술인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TV 정치 풍자 프로그램도 되살아났지만, 아직까지는 '정치인의 외모'를 풍자하는 것에 그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토론의 장이 열릴지 모르겠지만, 좀 더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문화-정치 토론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쟁 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브로드웨이에선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의 트럼프 대통령 풍자 1인극의 막이 곧 오를 예정인 것처럼 말이다.뉴욕 김은별 특파원 silverstar@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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