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 여행(旅行)

홀로 떠난 여행은 허망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아침에 고속터미널을 찾았지만, 빈 자리는 쉬이 나지 않는다. 어렵사리 고창행 버스에 오른다. 창밖을 바라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것 외에 그닥 할 일이 없다. 고창터미널에 내려 선운사행 시내버스를 타려고 보니 한 시간도 더 남았다. 터미널 근처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비우고 서성이는 것. 시골풍경을 오랜만에 찬찬히 느껴보는 것. 그렇게 느리게 도착한 선운사 앞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하다. 5월의 봄 기운만큼이나. 조용히 걷기에는 좋은 날이 아니다. 도솔천을 따라 혼자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으니, 여기저기서 사진 찍어달라는 부탁뿐이다. 복잡했던 머리가 더 무거워졌다. 걸음은 빨라졌고, 어느새 도망치듯 그곳을 떠나고 있었다. 3년 전 봄바람에 취해 무턱대고 떠난 여행이었다. 늦은 밤 홀로 길을 잃고 파리를 헤매던 길(오웬 윌슨)은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홀연히 나타난 고풍스러운 푸조 자동차에 올라타게 된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1920년대 파리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을 만난다. 그렇게 매일 밤 시간여행을 떠난 길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피카소와 그의 연인 아드리아나를 만난다. 아드리아나에 반한 길은 그녀와 함께 마차를 타고 1890년대로 다시 한 번 거슬러 올라간다. 아드리아나는 꿈꿨던 그 시대에 남기로 하지만, 길은 현재로 돌아온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꿈을 향해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의 이야기다. 공주 앤(오드리 헵번)은 왕실의 정해진 일정에 싫증을 느끼고 몰래 로마대사관을 빠져나온다. 진정제 과음으로 잠이 든 그녀를 미국 신문기자 조(그레고리 펙)가 발견하고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재워준다. 두 사람은 스쿠터를 타고 로마 시내를 다니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앤은 스페인광장 계단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조는 사자 석상 입에 손이 잘린 것처럼 앤을 놀래키며 친해진다. 조는 그녀가 앤 공주임을 알아채고 카메라맨을 시켜 특종사진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조는 특종을 포기하고 앤의 귀국 기자회견장에서 추억으로 남을 사진묶음을 선물로 건넨다. 영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의 내용이다. 여행에는 좋은 동반자가 필요하다. '길'이나 '조'처럼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든, 함께 여행을 시작하든. 서로의 얘기를 들어주고, 같은 목적지를 향해야 한다. 먹고 싶은 음식이 맞아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말투나 조그만 습관도 상대방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된다. 깊은 이해심도 필요하다. 그래야 예정했던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다. 연인이, 친한 친구가 여행을 다녀온 뒤 멀어지는 일도 많다. 좋은 여행 동반자를 만나기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올 봄에는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나려 한다. 여태 나와 단 둘이 멀리 다녀보지 않은 그녀다. 45년 간 사랑을 받았지만, 비행기 한 번 태워드리지 못했다. 일흔일곱 할머니가 된 그녀가 올 봄 나에게 가장 훌륭한 동반자다. 그녀의 남편도 동행했으면 좋으련만. 그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셨다. 곧 다가올 봄, 여행을 함께 할 여러분의 동반자는 누구신가. 조영주 경제부 차장 yjcho@asiae.co.kr조영주 기자 yjcho@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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