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은 왜, 숨막힐수록 더 행복할까요

[아시아경제 나경아 기자]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들 때 착안한 것은 하나와 하나가 아니라 하나를 반쪽씩 나눈 절반과 절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하나와 하나였다면 남자와 여자는 생의 태엽이 풀리는 내내 그토록 그립게 서로를 바라보는 짓 따윈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이 완전한 하나에서 나뉘어진 것들이기에 나머지 반쪽을 바라보는 시선은 애틋하고 질길 수 밖에 없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의 일부.

인간은 그래서 두개의 자기를 가집니다. 하나는 지금 자기가 입고 있는 남자와 여자로서의 자기, 또 하나는 원래 암수한몸이었던 시절의 완전한 존재로서의 자기. 그리움이란 바로 '원래의 자기'에 대한 향수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말해온 사랑이란 것은, 저쪽 절반을 제압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일 수 없으며, 오로지 저쪽과 이쪽을 하나로 잘 결합하여 완전한 삶의 기쁨에 이르는 것일 겁니다.저 태초의 기획이 놀라운 것은, 반쪽과 반쪽이 그저 하나를 뚝 잘라 반으로 나눈 절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남자라는 절반과 여자라는 절반은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남자는 철(凸)의 절반이요, 여자는 요(凹)의 절반입니다. 아니 딱이 그렇지도 않습니다. 남자도 요(凹)가 있고 여자도 철(凸)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볼록하고 오목한 남자와 여자가 암나사와 수나사처럼 단단히 결합되는 것, 그것이 포옹입니다. 포옹은 참 희한합니다. 껴안으면 껴안을 수록 더 깊이 껴안고 싶어집니다. 이미 이쪽과 저쪽 사이 1밀리미터의 틈도 없어졌는데 그래도 더욱 세차고 아프게 껴안습니다. 그리고 그런 껴안음이 얄궂게도 더할 나위없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이 욕망엔 신의 설계도가 놓여 있습니다. 포옹은 바로 암수한몸의 신성(神性)을 향한 향수가 아닐까요. 그냥 무뚝뚝하게 중동을 자른 반쪽이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그리움이 저 오목볼록의 감수성으로 들어와 앉아 서로를 깊이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된 게 바로 포옹이란 행위의 내면 아닐까요.
기실 생각해보면 사랑이라 불리는 마음의 움직임과 태도와 행위는 모두 포옹의 은유를 따르고 있다 할 만합니다. 그리움이란 건 '느슨한 형식의 포옹'입니다. 형식만 느슨할 뿐이지 그 안에 움직이는 긴박함까지 느슨하다는 건 아닙니다. 그리움은 포옹처럼 몸과 몸이 밀착되어 있는 건 아닙니다. 공간적인 거리를 두고 있거나 시간적인 차연(差延)이 있기도 합니다. 그리움은 거리가 발생시키는 포옹 욕망의 자장(磁場)이라 할 만합니다. 포옹은 또한 몸사랑을 위한 기본적인 자세이기도 합니다. 시한부 목숨을 받아 유한의 태엽을 풀며 살아가는 인간이 영원을 구가할 수 있는 건 '자손'이란 존재 승계 방식을 쓰기 때문입니다. 몸사랑은 바로 유한한 인간의 영생을 설계한 신의 핵심 코드입니다. 포옹은 그 코드로 나아가는 거푸집같은 것입니다.포옹은 소박하고 절박하고 고맙고 든든한 사랑의 내구재입니다. 포옹이 뜨거울 때 사랑은 그 안에서 아프고 기쁘게 숨을 쉬며 포옹이 식어갈 때 거기 숨쉬던 사랑 또한 슬그머니 휘발합니다. 와락 껴안고 싶은 마음이야 말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사랑 그 전부일지 모릅니다. 포옹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당신의 사이를 위한 것입니다. 나와 당신의 틈 새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기류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일입니다. 포옹은 원래 '나'였던 존재를 지근(至近)거리에서 느끼고 냄새 맡는 일입니다. 존재와 존재의 가장 많은 표면이 서로 닿아 온몸으로 내통하는 일입니다. 그리웠던 모든 것들이 제 짝을 만나 서로 피부호흡을 하는 일입니다. 당신의 머릿결에서 풍겨나는 향기에 코를 대고는 숨도 쉬지 못한 채 가만히 떨고 있는 일입니다. 나경아 기자 isomis@naver.com<ⓒ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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