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블로그] 이세돌, 바둑 그리고 사람

[아시아경제 류정민 차장] "이세돌이 진 것이지 인간이 진 것은 아니다." 이세돌 9단은 인공지능(AI) '알파고(AlphaGo)'와의 제3국에서 패한 뒤 이런 말을 남겼다. 종합전적 0대3으로 패배가 확정됐을 때 그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프로 바둑 기사에게 패배가 미치는 충격파는 상상 그 이상이다. 몇 개월이 지나도 아니 몇 년이 지나도 아쉬움은 지워지지 않는다. 특히 이세돌은 승부욕이 강한 것으로 유명한 기사(棋士)다. '인류 대표'라는 외부의 시선은 이세돌에게 극도의 부담감을 안겨줬다.
세계의 관심이 한 몸에 쏠리는 상황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는데 어떻게 의연할 수 있을까. '쎈돌'이라는 애칭의 이세돌은 세계 바둑계를 호령하던 인물이었다. 쟁쟁한 기사(棋士)들이 그의 칼날에 쓰러졌다. 이세돌의 강점은 바둑의 판세를 바꿔버리는 회심의 일격이다. 그의 승부수에 전세는 역전되기 일쑤였고, 상대는 '정신적 충격'에 평정심을 잃었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인간이 아닌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이세돌 특유의 '흔들기'가 통할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상대는 인간처럼 정신적인 압박과 체력적인 부담을 느낄 리 없다. 알파고는 1202개 중앙처리장치(CPU)로 1초당 10만 개의 경우의 수를 계산한다. 인간의 머리로는 흉내를 낼 수도 없는 수준이다. 바둑이 확률과 계산만으로 승부가 갈린다면 알파고와의 승부는 해보나 마나다. 하지만 4000년 역사의 바둑에 담긴 혼(魂)을 알파고가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사람의 창조적 상상력은 바둑돌의 효율이나 승리 확률의 계산으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쎈돌'은 바로 그것을 보여줬다. 제4국에서 꺼낸 '흑 78수'는 프로바둑 기사도 예측하지 못한 이세돌 특유의 한 방이었다. 전남 신안군 비금도 섬 소년 이세돌을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렸던 회심의 일격은 알파고에도 통했다. 알파고는 결국 'Resigns'이라는 팝업창을 띄우며 불계패를 인정했다. '인류의 자존심' '인간 승리' '위대한 첫승' 등 찬사가 이어졌다. 이세돌은 멋쩍은 웃음으로 승리의 기쁨을 대신했다. 이세돌에게 이번 대국은 바둑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승부였다. 하지만 이세돌은 절망의 상황을 이겨내는 힘을 보여줬다. 제5국 대결 결과와 무관하게 그는 이미 승자다. 이세돌은 가로세로 19줄, 모두 361개의 점을 앞에 두고 바둑돌 하나를 놓았을 뿐이지만, 그 돌의 조합이 누군가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될 것이란 걸 알고 있을까. 용기라는 든든한 바이러스를 사회에 널리 퍼뜨린 이세돌, 그의 모습에서 많은 사람은 또 하나의 봄을 느끼고 있다. 류정민 차장 jmryu@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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