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24편 '007 스펙터'...다니엘 크레이그, 이번 작품을 마지막으로 007 하차
샘 멘더스, 기존의 본드 공식 비틀었으나 개연성 부족
크리스토퍼 놀란 등 시리즈 부활 부담 느낄듯
영화 '007 스펙터' 스틸 컷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유머와 능청은 사라지고 고독만 남았다.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 여전히 유능한 스파이지만 상처 입은 남성의 표상이 됐다. 그럴 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다. 반세기 동안 세계는 격변했다. 냉전시대의 한 축이었던 소련이 해체됐고, 베를린장벽도 무너졌다. 새로운 상대는 베일에 싸인 테러리스트와 다국적 기업의 자본가. 적과 아군을 분간할 수 없는 시대에 MI6마저 통제하지 못하는 본드는 골칫덩어리나 다름없다. 그는 무기력에 빠진다. '스카이폴(2012)'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었다. 유사 어머니와 같던 MI6 역시 스스로 존재 의미를 찾아야 할 만큼 입지를 위협받는다. 본드는 그 안에서 전용 자동차를 넘겨받지 못할 만큼 코너에 몰려 있다.'스펙터'의 메가폰을 잡은 샘 멘더스(50)는 본드의 이 불안한 상황에 주목한다. 전작 '아메리칸 뷰티(1999)'에서 레스터 번햄(케빈 스페이시), '로드 투 퍼디션(2002)'에서 마이클 설리반(톰 행크스)에게 그랬듯 본드의 내면을 시각화하는데 집중한다. 그런데 그 색칠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53년을 달려온 '007' 시리즈의 두 줄기인 사랑과 악당까지 비틀었으나 실패에 가깝게 끝났다.
영화 '007 스펙터' 스틸 컷
'스펙터'의 메인 악당 프란츠 오버하우서(크리스토프 왈츠)는 에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다. '위기일발(1963)', '썬더볼 작전(1965)', '두 번 산다(1967)', '여왕 폐하 대작전(1969)' 등 '007' 시리즈에 여섯 번 등장한 본드의 숙적이다. 고양이를 품에 넣고 의자에 앉은 뒷모습이 '오스틴 파워' 시리즈의 닥터 이블, TV 애니메이션 '컴퓨터 형사 가제트'의 클로 박사로 이어졌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멘더스는 이 캐릭터를 그동안 시리즈가 다루지 않은 본드의 과거와 연결했다. 어린 시절 본드에게 스키를 가르쳐준 수양아버지 한스 오버아우서의 친아들로. 블로펠드는 본드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는 이유로 증오를 키우고 본드의 삶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생사를 넘나드는 스케일을 떠올리면 막장에 가까운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내면과 감정을 드러내는 신은 유리벽을 마주하고 나누는 대화가 전부다. 이를 아는지 본드 역시 블로펠드의 증오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영화에는 '스펙터'로 대변되는 '여왕 폐하 대작전'의 스키 신도 나오지 않는다. 개연성 부족에 단순한 기대마저 저버리니 몰입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영화 '007 스펙터' 스틸 컷
멘더스가 바꿔버린 사랑 공식도 맥이 풀리기는 매한가지다. 앞선 스물세 편에서 본드가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는 '카지노 로얄(2006)'의 베스퍼 린드(에바 그린)뿐이었다. 이번에 나오는 매들린 스완(레아 세이두)는 그에 버금가는 캐릭터로 설정됐다. 이름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느를 홍차에 찍어먹으며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마르셀을 떠올리게 한다. 린드를 잃으면서 사랑과 믿음의 문을 닫은 본드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할 기회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스완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상류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집안의 이름이기도 하다. 멘더스는 본드와 스완이 처음 만나는 장소를 사방이 하얗게 물든 알프스의 병원으로 설정하고, 스완에게만 검은 옷을 입힌다. 블랙 스완을 상기시키면서 다시 오지 않을 또 한 번의 강렬한 사랑을 예고한다. 실제로 본드는 '카지노 로얄'에서 린드와 그랬듯 달리는 고속열차에서 스완과 처음 사랑의 감정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둘 사이는 그다지 애틋해 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 전에도 후에도 특별한 연인으로 발전할 만한 동기나 조짐이 거의 나오지 않아 샘 스미스(23)가 보른 영화 주제곡(Writing's On The Wall)의 애절함이 무색해진다. 초반에 등장하는 서포팅 본드걸 루시아 시아라(모니카 벨루치)도 별반 다르지 않다. 본드를 유혹하기에 충분한 중년의 섹시미를 선보이지만 아쉽게도 한 차례 대화를 나누고는 퇴장한다.
영화 '007 스펙터' 샘 멘더스 감독
'스펙터'는 액션에서도 많은 취약점을 보인다. 특히 극 초반 멕시코시티에서 헬기가 추락하는 신에서 엄청난 스케일을 조명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시리즈 특유의 긴박감을 놓친다. 후반 헬기가 권총에 맞아 추락한다는 설정에서는 멘더스의 오만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블로펠드를 돕는 미스터 힝스(데이브 바티스타)의 존재감도 미약하다. '문레이커(1979)'의 죠스, '골드핑거(1964)'의 오드잡처럼 과묵한 거구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액션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누구보다 이를 아쉬워할 바티스타는 미국프로레슬링(WWE) 시절 선보였던 피니시 기술 '파워밤 휩(다리 사이에 상대의 얼굴을 넣고 번쩍 들어 올린 뒤 그대로 내치는 기술)'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을 것이다.멘더스는 본드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부여하면서 린드를 잃은 악몽까지 소환할 수 있었지만 해피엔딩을 택했다. 템스강에 권총을 던져버린 본드를 스완과 함께 유유히 사라지게 놓아줬다. 이번 영화를 끝으로 크레이그가 007 시리즈와 작별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 듯한 이 대목은 꼼꼼한 멘더스의 연출력에 흠집을 냈다. 형태만 남은 잿더미가 풀썩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다. 멘더스도 함께 007 시리즈를 떠난다. 007 시리즈의 새 지휘자로 거론되는 크리스토퍼 놀란(45)은 지금쯤 리부트(rebootㆍ재시동)에 부담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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