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기억, 무기의 모순

38선 이북서 넘어온 이들의 피난촌 자료·무기가 지닌 부조리 담은 사진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한국전쟁 추모일을 전후로, 전쟁과 관련된 전시들이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억들을 상기시키는 기록들이 소개된 한편, 무기라는 이미지로 덧씌워진 전쟁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질문하게 하는 전시가 마련됐다.'1950 군산, 6월의꽃'·'프로즌 오브제' 전시전쟁을 주제로 한 전시회 두 편

전쟁 직후 군산 거리의 아이들.

전쟁 직후 군산 장미동 피난민촌

전우에게 받은 편지

◆전쟁의 기억…군산 사람들의 이야기 = 6ㆍ25를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쟁'이란 무엇일까. 영화나 책 속에서 봐온 전쟁과 경험으로서의 전쟁은 확연히 다른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 희생자가 가장 많았고, 민간인 학살의 아픈 역사를 지닌 곳, 군산. 전쟁을 겪은 군산 시민 열일곱 명이 기억을 더듬었다. "7월 14일 날은 이 양반들이(학도병들이) 떠난 날이잖아. 그러니까 그 날을 제삿날로 해서 제사를 지냅니다." (이진원씨ㆍ78)"죽은 사람을 끌어다가 모래밭 강 모래밭 강둑 밑에 제방 밑에다가 파고 태극기로 덮어주고 묻고 왔어."(남정근씨ㆍ85)"한국 동란 당시에는 황해도에서 피난민들이 많이 내려와 가지고 고아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열네 곳이나 군산에 고아원이 생길 정도였는데."(박경희씨ㆍ93)"비행기가 엥 하고 뜨면 그때 학교 다녔는데, 비행기가 뜨면 풀밭에 대가리만 처박는 거야 학교가다가도 엥 하면은 폭격을 한게."(이순애씨ㆍ77)낙동강 기슭에서 친구의 시체를 급히 묻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학도병, 황해도에서 유엔군 상륙전용 함선을 타고 낯선 군산에 내려야 했던 피난민. 이들에게 닥쳤던 전쟁과 가슴 아픈 기억이 생생한 육성과 함께 영상에 담겼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이 같은 영상자료와 함께 해병대 전투 관련 자료, 전쟁 기간 중 일기와 편지, 사진 자료 등 200여 점을 수집해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이 자리한 장미동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촌이 형성된 지역 중 하나다. '38선 이북에서 온 피난민들'이라는 의미로 '38따라지'라 불린 이들은 1951년 1ㆍ4후퇴 당시 약 2만5000여 명이 군산 해망동 인근 솔곳이와 조촌동, 나운동 등지에 집단촌을 구성했다. '1950 군산, 6월의 꽃'이라는 전시 제목에는 전쟁을 치른 세대의 삶에 대한 위로와 경의가 담겼다. 또한 이 전시는 젊은 세대들에게 전쟁의 의미와 실상을 전달하고자 국립민속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됐다. 전시장에선 전쟁의 실상과 아픔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참전용사들의 서명이 있는 태극기, 미군과 국군의 주력 무기였던 M1개런드 소총, 심리전 도구로 활용된 '종이폭탄' 삐라, 죽음을 앞둔 전우로부터 받은 편지, 전쟁 중 가족을 잃은 사람의 일기 등이 눈길을 끈다. 군용물품을 재활용해 만든 각종 생활용품, 피난민촌 외상장부 등 피난민과 전쟁고아 관련 자료, 반공 포스터 등에선 전쟁 후 군산 사람들의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개정중앙병원을 설립하고 농어촌 위생 및 위생 계몽활동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영춘 박사(1903~1980년) 관련 자료와 주한미군 키스 아이스버그(Keith V Eisbergㆍ81)가 촬영한 1953년 군산의 풍경 사진도 나와 있다. 오는 9월 29일까지. 063-443-8283.

임안나 작품 'WarshipWorship'

임안나 작품 '프로즌 오브제' 시리즈.

◆전쟁의 모순…무기에 던진 낯선 시선 = 매년 6월 25일을 전후로 전쟁 무기와 관련된 전시를 여는 여성 사진작가가 있다. 임안나 작가(45). 그가 전쟁에 관한 부조리를 담은 세 번째 전시를 열었다. 전시 제목은 '프로즌 오브제(Frozen Objets, 얼어 있는 오브제)'다. 작품에는 우리나라 곳곳에 거대한 폐 무기들이 설치돼 있는 풍경을 촬영한 기록사진 연작과 모형으로 제작된 신화 속 전쟁 영웅들과 장난감 무기가 모인 가상의 박물관을 다시 사진으로 찍은 것들이 나와 있다. 작가는 왜 이 같은 엉뚱한 연출과 사진을 하게 된 걸까? 마흔 즈음, 그는 자신의 사진 작업의 방향을 바꿨다고 했다. 개인적인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무언가 사회적인 소재를 담아 질문하는 작업이 되게 하고 싶었다. 더욱이 2007년께 군대를 방문해 아르바이트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여성으로서 처음 가본 군대의 모습은 참 생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군대 뿐 아니라 휴게소나 놀이동산, 야외 공원과 같은 엉뚱한 곳에서도 폐무기와 탱크들이 전시돼 있는 모습에 낯선 시선을 던졌다. "전쟁은 개인에겐 선택의 여지없이 일어나는 두려운 것이잖아요. 그런데 지금 무기가 전쟁의 기억을 유지하는 상징으로 남아 있어요. 무기를 통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죠. 살상의 내용은 없고 영웅처럼 여겨지는 것. 스텔스기와 같은 차가운 기계 하나로 평화를 지킬 것 같은 이미지를 덧씌우는 게 참 의아했어요."무기가 지닌 부조리가 반영된 그의 사진 속에는 실재와 허상, 두려움과 가벼움이라는 상이한 면모들이 한 데 어우러져 있다. 해변 위에 우뚝 솟아 위엄 있는 전투기는 실상 작은 장난감을 모형 박스 위에 얹어놓은 것이고, 온통 백색인 가상의 박물관을 찍은 작품 속 붉은 풍선은 풍자적인 요소를 지닌다. 작가는 "개인적으로 빛 조절이 필요한 조명 작업을 재밌어 한다. 백색을 기술적으로 디테일하게 표현하려는 욕심이 있었다"라며 "백색은 다 덮어 버리면서도 본질을 보게 하는 색이라고 생각한다. 풍선의 경우는 가볍고 그대로 두면 매일 줄어드는 성질을 통해 허상이나 유희를 나타내려 했다"고 했다. 작품은 "어떤 이념적인 이야기도, 무엇을 비판하려는 의도도 아닌" 예술적 질문이다. "전쟁이란 거대 담론 앞에 개인이 다가갈 수 있는 또 다른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족하다"는 게 작가의 의도다. 7월 19일까지. 서울 종로구 효자로 진화랑. 02-738-7570.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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