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가장 많은 정보를 습득하는 창구는 다들 알다시피 눈이다. 이는 예전부터 받아들여진 사실이었던 듯한데 그건 한자어들을 봐도 추정할 수 있다. 머리를 뜻하는 한자 혈(頁)이나 수(首)를 보면 눈(目)이 곧 머리고 얼굴이었다. 눈이 얼굴에 있는 다른 기관들에 비해 특히 크거나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아닌데도 이렇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내세운 건 눈이 아마 세상의 일들이 몸으로 들어오는 문이며, 그래서 그 사람의 정신으로 이어지는 통로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걸 접한다는 것이 곧 그 정보를 정확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연구결과는 오히려 감각기관들 중에서 눈이 가장 정보 인식이 혼동되기 쉬운 기관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많이 본다고 해서 제대로 보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눈이 갖는 이 약점에 대해선 옛사람들도 많이 경계했다. 이목(耳目)이라 해 눈을 귀의 뒷자리에 둔 것도 눈의 '오만'을 꺾으려는 뜻이었던 듯하다. '본다'는 것도 여러 단계로 나눠 시(視)에서 관(觀)으로, 다시 찰(察)로 더욱 깊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 모두가 눈을 높여주면서도 과신해서는 안 된다는, 눈의 이중성에 대한 경고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뜻하는 'SNS'를 한글로 치면 '눈'이 쓰인다는 것은 이 이중성의 측면에서 볼 때 가볍지 않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고 읽는 창이 되고 있는 트위터며 페이스북이며 인터넷 댓글들은 분명 우리에게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새로운 눈이다. 이 새로운 눈을 통해 우리가 접하는 정보는 과거에 생각지도 못했을 만큼 방대해졌다. 그러나 많이 본다고 해서 결코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니라는 점 역시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뭔가를 많이 보는 것이 오히려 정확히 보기 힘들게 하고 많이 받아들임으로써 다른 뭔가를 막는 역설이다. 눈처럼 새로운 SNS 역시 그 이중성의 어두운 면이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고쳐먹는다. 애꿎게도 눈이며 SNS를 괜히 타박해 될 일인가.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이 눈이며 SNS일까.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은 외물이 아니라(色不迷人)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 혼미한 것(人自迷)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뭔가를 본다는 것은 결국 머리와 생각의 문제다. 모든 이들이 이를 새겨야겠지만 특히 많은 것을 보는 사람,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제대로 보는 것이어야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특히 그래야 할 것이다.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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