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알바시네]1. '그녀(her)', 섹스리스 컴퓨터의 사랑

영화 '그녀'

스파이크 존즈의 영화 '그녀'를 보기 전에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와 유사할 거라는 선입견을 지니고 있었다. 혼수상태의 여인에게 바치는 사랑, '그녀에게'는 사랑의 소통 불가능성(혹은 일방적인 소통)에 대한 깊은 절망을 내게 아로새겼다. 영화가 통째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러나 이 2002년 스페인영화와 2014년 미국영화는 사랑의 소통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아주 다른 차원으로 그 줄거리를 전개하고 있었다. 전자가 유럽적이고 예술적이라면, 후자는 디지로그적이라고 해야할까. 디지털 속의 아날로그가 어떻게 진화하는가를 생각해보게 했다. 영화 '그녀'가 나를 전율케 한 것은 몇년전 박사과정 수업 때 들었던 학구적인 내용이 그대로 하나의 스토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도 "이건 정말, 영화가 될만한 생각인걸?" 하는 말을 했었기에 더욱 놀라웠다. 바이런 리브스(Byron Reeves)와 크리포드 내스(Clifford Nass)가 쓴 책 '미디어 이퀘이션(The Media Equation, 매체 방정식)'에는 영화 '그녀'를 읽는 솔루션이 날것으로 빼곡이 담겨있다. 매체 방정식이라는 게 어려워보이지만, 별 거 아니다. '미디어 = 사람(혹은 삶)'이라는 등식을 증명해보인 것일 뿐이다. 미디어는 텔레비전, 컴퓨터, 혹은 스마트폰 따위를 말하고, 그것을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인간이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나 전화기를 '사람'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현상이 있다. 이것을 단순한 착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무의식이나 삶 속에 깊숙이 진행되어, 진짜 인격적인 존재로 되어가는 것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어떻게 보면 황당하지만 어떻게 보면 아주 일리가 없지도 않다. 텔레비전을 자주 보는 사람은, 텔레비전의 뉴스나 스포츠, 혹은 드라마들이 텔레비전 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하며, 가끔 그 내용에 분개하여 재떨이를 던지기도 하고 그것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너무나 멋진 장면에 텔레비전을 껴안기도 하고 화면 속의 얼굴을 매만지기도 한다. 컴퓨터도 마찬가지다. 컴퓨터 속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이 현실과 다름없는 하나의 세상처럼 느껴지며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의 인기척을 실제로 느끼는 듯 하다. 또한 컴퓨터가 먹통일 때 마치 기계 자체가 자신에게 고집을 피우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한다. 스마트폰은 TV나 PC보더 더 인격화된다. 그 안에서 이뤄지는 소통은 절대적이며 폰을 잃어버리면 놀라운 금단증세가 오기도 한다.

영화 '그녀'

리브스와 내스는 '매체 방정식'에서 미디어가 매너와 성격과 감정과 성별(남자/여자)과 목소리와 믿음(신뢰도), 이미지 크기나 화질, 음질 등으로 인간의 의식 속에 포지셔닝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PC의 운영체제(Operation System, OS)가 인간과 긴밀히 소통할 수 있는 수준의 인격적 존재로 진화하는 상황을 표현해냈다. 아내와의 불화로 오래 별거하고 있는 테오도어는 러브레터를 대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 시점은 지금보다 조금 더 문명이 진화된 어느 시대이다. 테오는 그 무렵 막 개발된 '최첨단 PC운영체제'를 구입한다. 그 운영체제는 인간과 다름없는 지능과 판단력과 감정을 지니고 있어서 PC 속의 모든 기능들을 사람 대신 해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사용'하는 인간과 일상적으로 이야기는 나누며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사랑의 감정까지 느낀다.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OS는 여성이 되었고, 그녀는 자기의 이름을 지어 말해주기도 한다. 사만타. 그 발음의 느낌이 좋아서 지금 방금 붙였단다. 아, 언제나 부르기만 하면 가만히 다가와 말벗이 돼주는 목소리여인. 사만타. PC를 사랑하는 인간과, 인간의 사랑하는 PC의 '넘사벽(넘나들 수 없는 사랑의 벽)'이 영화 '그녀'의 갈등을 만들어낸다. 시인 최영미가 ‘컴퓨터와 x하고 싶다’고 그녀의 시에서 거칠게 고백했을 때, 저 OS의 정사를 예언하고 있었을까. 이쯤 되자 질문이 막 쏟아져나온다. 저 OS는 우리가 영육이 분리된 영혼(혹은 귀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육체가 없는 정신이 저런 기계적 방식에서 생겨날 수 있을까. 자기 프로그램을 스스로 수정하며 진화를 거듭하는 저 지적 무형물(無形物)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문명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복잡성과 편리함과 속도와 피로감과 과잉성이 인간끼리의 소통을 방해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대신할 완전체가 나올 수 있을까. 바디가 없는 스피릿은 우리를 구원할까, 저 영화처럼 다시 바디를 버리고 다른 차원으로 날아가버릴까.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사랑할 조건이 갖춰지지 않거나 상대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을 진행할 수 없는 '사랑력(力)' 자체에 결함이 생기기 시작한 때문이 아닐까. 그런 질문들. 내가 꿈꾸고 있는 사랑은, 다만 나를 대행하여 내 삶을 살아주는 OS가 아니었던가. 이기(利己)와 에고에 바탕한 욕망의 정체를 들키는 것 같아 순간 움찔한다. 인간은 자아와도 같은 '내면의 운영체제'를 잃어버린 채, 늘 한결같은 목소리를 전해주던 구원의 이어폰을 떼고 다시 '소통의 천국'에서 버림받는다. 영원히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 불길한 사랑의 이항(二項)을 담은 저 묵시록같은 영화. 그녀는 문장 속에 들어있는 소문자 her처럼, 행간에서 머물다가 I love라는 문장과 함께 휙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덩그라니 소문자 i만 남았다. 헐!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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