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남선생님은.....?” 뜨거운 차가 한잔씩 돌고나자 하림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 저 말이예요? 사실 저도 허선생님 한테서 침을 맞고 있어요. 배우기도 하구요." 남경희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걸 보면 그리 대단한 관계는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수관 선생의 입술에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그래, 오신 일은 잘 되어가고 있소?” 그가 하림을 향해 말했다. 거두절미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저.... 그냥.” 하림 역시 밑도 끝도 없이 대답했다. 그가 무엇인가를 알고 한 질문이었다면 그 대답 밖에 할 수 없었고, 그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레짐작 넘겨짚기로 던진 질문이었다면 또한 그 대답 밖에 할 것이 없었다. 수관 선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가까이 있다고 더 잘 보이는 것은 아니라오. 숲에 들어간 사람이 나무를 더 잘 볼 것 같지만 그게 아닌 것과 같소. 어떤 때는 멀리 있어야 더 잘 보이는 법이지요.” 선문답이었다. 선문답이란 다른 옆에 있는 사람은 무슨 쓸데없는 소린가 싶은데 당사자가 들으면 핵심을 찌르며 일격을 가하는 화법이었다. 하림은 그가 그런 선문답을 통해 무언가 자기에게 메시지를 던져주고 싶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혜경이에 관한 이야기 같기도 했고, 어쩌면 하소연이나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같기도 했다.“명심하겠습니다.” 하림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굳지 무엇을 명심하겠다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선문에는 그저 선답이 있을 뿐이었다.“사람들 마음 속엔 누구에게나 짐승이 한 마리씩 들어앉아 있다오. 사나운 세상을 만나면 신이 나서 날뛰기 시작하는 짐승 말이오. 지금은 사나운 세상이오. 일찍이 성인이나 선지자들이 빛으로 오시어 순한 세상을 만들려고 애를 썼으나 모두가 허사였소. 하긴 이 정도 사는 것도 모두 그 분들의 은혜인지도 모르지만.... 순한 세상.... 허, 그게 꿈인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이제 세상은 돌이킬 수 없는 병에 빠졌다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곳이 없는 시대요.” 차탁을 사이에 두고 그는 하림과 남경희를 향해 다시 장광설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림이 자기를 향해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남경희를 향해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이런 세상에 기도원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번에는 분명히 남경희를 집어서 말했다.“그럼, 허선생님은 도와줄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방외자인 내가 도와줄 일이 어디 있겠소?”“최소한 노인분들은 설득해주실 수 있잖아요?”“하하. 그들이 언제 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수?” 수관 선생이 공허한 웃음을 날렸다. 얼핏 남경희의 얼굴에 실망한 빛이 지나갔다.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김영현 기자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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