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왕릉 옆 국정원, 그 성역들에 대해

조선의 태종이 묻힌 서울 외곽의 한 왕릉에 가면 사뭇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진다. 적잖은 전경들이 경비를 서고 있어 괜히 조심스러워진다. '지하에 누워 있는 태종에 원망이 있어 항의하는 시위라도 하는 걸까'. 그러나 실은 이 능이 아닌 그 옆에 당당한 위용으로 서 있는 건물을 지키고 있는 것인데, 바로 국가정보원이다. 왕릉과 국정원이 바로 이웃해 있는 모습, 과거와 현재의 막강 권력이 나란히 있는 풍경은 묘한 대비를 이룬다. 살아생전 여느 왕보다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태종, 그리고 현대의 권력기관인 국정원. 그러나 전자는 이제 자신의 유택(幽宅)을 개방해 시민들의 휴식처로 내주고 있는 반면, 후자는 새로운 성역이 돼 있으니 이 현대의 성역은 '안보' 와 '정보'와 '기밀'이란 말이 내뿜는 신성한 권위가 구축해주는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 역사에서 이 안보기관은 오랫동안 국가의 안보보다는 정권의 안보기관이었다. 권력기관이라기보다는 '폭력기관'이었다. 이 기관이 고문과 비행을 일삼을 때 헌법조차 이 기관의 내규 아래에 있었다. 90년대 이후 문민화와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이 기관은 가까스로 법치와 민주적 통제를 받게 됐다. 개혁의 이름으로, 과거청산의 이름으로 수술이 가해졌고, 이 기관은 국민들에게 거듭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대선 개입을 둘러싸고 드러나고 있는 진실은 그 같은 반성과 '정상화'가 얼마나 한순간에 후퇴해버렸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안보와 기밀의 이름으로 40km의 지각보다 더 두터운 장막을 칠 때 그 안에서 얼마나 부패, 저급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남용되기 쉬운 권력에 대한 견제는 권력 자신의 의지와 선의에 대한 기대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의 생생한 예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전 책임자 원 모씨-이름을 다 쓰지 않는 것은 그의 명예의 보호가 아니라, 그런 인간의 지휘를 받은 데서 모멸감을 느낄 국정원의 자존심과 '국격'의 보호를 위해서다-의 행각에서 나타나듯 '특별한 권력'은 그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민적 교양과 의식이 없을 때 얼마나 위험하고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국정원의 행태를 보며 드는 지금의 걱정이 기우로 끝나길 바란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음지에서 양지를 위해 일하는' 선량한 이들이겠지만, 행여라도 왕릉 옆에서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를 꿈꾸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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