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훈칼럼]'20만원, 이건희 회장도 받아야 합니까'

먼저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양해를 구해야겠다. 이 회장 개인과 무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의 이름을 여러 차례 쓰게 된 사정 때문이다.  발단은 퇴근길 자동차 라디오다. 켜자 귀에 익은 시사프로그램 사회자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모 대학 복지학과 K 교수와의 전화 인터뷰가 한창이다. 주제는 기초연금. 두 사람은 '이건희 회장도 20만원을 받아야 하느냐"는 다소 엉뚱한 주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초 공약은 모든 65세 이상 어르신들께 월 20만원씩 지급하는 게 골자죠?(사회자) - 그렇죠.(K 교수)  - 그럴 경우엔 이건희 회장 같은 분들도 받게 되지요?(사회자) - 그렇죠. 기초연금을 제대로 도입을 하려면 증세가 불가피하고, 이건희 회장 같은 분은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세금으로 내셔야….(K 교수) - 하지만 연금에 과세해도 이건희 회장 같은 분들이 받은 20만원 전액을 환수하는 것이 아니라 세율만큼 내는 것 아닌가요. (사회자) - 그 말이 아니죠. 예를 들어 사회복지세가 도입돼 소득세가 2%정도 증가 한다면, 훨씬 많은 돈을 내셔야…. 어느 한 분을 놓고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은데요. (K 교수) - 그렇긴 합니다만, 워낙 공인이시니까.(사회자) '워낙 공인'이어서 도마 위에 올랐던 이건희 회장의 이름은 이쯤에서 양자 합의로 퇴장했다. 그는 말하자면 '고소득계층'을 뜻하는 상징적 대명사였다. 이 회장이 포함되면 보편적 복지, 제외되면 선별적 복지가 됐다. K 교수는 약속대로 보편적 복지를 하되 재정이 모자라니 증세하자는 주장이었다.  기초연금 논란에 이건희 회장의 이름이 오르내릴 이유는 애초에 없었다. 기초연금의 본질은 '소득, 직업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노후에 정액의 연금을 지급하는 공적연금'이다(사회복지학사전/이철수 외). 문제는 복지엔 돈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공약을 지키려니 나라 곳간에 돈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도 증세는 안 한다. 그래서 정부가 짜낸 고육책이 소득 상위계층 30%는 없던 일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대선 때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씩'을 약속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급기야 '죄송하다'며 사과했지만 어르신들의 섭섭함은 쉽게 풀릴 기색이 아니다. 누가 손을 벌였나, 지들이 먼저 주겠다고 했지. 공약을 흔들며 표를 구할 때는 언제고.  교과서적으로 보면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은 틀린 게 아니다. 기초연금의 기본은 모든 노인이 대상이므로. 정부의 공약 수정 또한 불가피했다. 재정의 어려움을 솔직히 고백하고 차선을 강구한 것은 대책 없이 밀어붙이는 것보다 낫다.  그런데 왜 여론은 들끓는가. 배반감은 감정의 문제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약속(새누리당 공약집 제목)을 뒤집었다. 불과 7개월 만이다. 원죄는 현실을 무시한 공약이다. 알고도 약속했다면 교활하고, 몰라서 그랬다면 멍청하다. 약속의 파기가 주는 감성적 상처는 재정건전성 같은 이성적 논리로 쉽게 덮어지지 않는다.  궁여지책의 산물인 차등지급 방식은 또 다른 논란거리다. 제외된 상위 30%에 '이건희 회장' 같은 노인이 얼마나 있을까. 30%의 아래쪽은 월 소득 80만원대다. 서울에 아파트 한 채만 있으면 수입 한 푼 없어도 연금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기에 새누리당 스스로 빈곤해소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지적한 국민연금까지 복잡하게 엮어 놓았다. 기왕 물러섰으면 뒷감당이라도 깔끔하게 하는 게 도리다. 성실한 국민연금 가입자가 왜 상실감을 느껴야 하나. 수입 없는 노인까지 부동산 따져 보겠다는 게 바른가. 누구나, 언젠가, 노인이 된다. 박명훈 주필 pmhoo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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