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년병 시절 노조편집위원을 할 때 편집기자가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노보(勞報)에 실은 적이 있었다. 제목을 어떻게 달까? 고심 끝에 이렇게 썼다. "편집기자는 기계가 아니다" 이 제목을 편집선배 한분에게 가져가서 보였더니 제목종이를 들고선 물끄러미 지켜본다. 잠시 뒤에 빨간 색연필을 꺼내 뒤의 여섯 자에다 줄을 죽 긋는다. 그리곤 그 위에 적는다. 편집기자는 "기계다" 당나라 때 임번이란 사람이 과거에 떨어진 뒤 낙향하다가 천태산에 들렀다. 아름다운 풍광에 처량하던 기분이 풀리면서 시 한수를 읊고 싶어졌다. 지나던 고사(古寺) 담벼락에 일필휘지로 한 수를 써놓았다. 절령신추생야량 絶嶺新秋生夜凉 학상송로습의상 鶴翔松露濕衣裳 전촌월락일강수 前村月落一江水 승재취미한죽방 僧在翠微閑竹房 (산마루 초가을 밤 서늘함이 돋네/학이 날자 솔이슬 후드득 옷이 젖는구나/앞마을 온 강물에 달빛 떨어지니/푸른 산허리 스님 하나 대숲서 한가롭구나) 임번은 산을 내려와 전당강 기슭의 여인숙에서 하루를 묵으려 짐을 풀었다. 그는 늦은 밤 강가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물에 비친 달을 구경하고 있었다. 강물이 썰물을 따라 물러나자 달빛이 강 전부가 아닌, 절반만 비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갑자기 그가 써놓고 온 시가 생각났다. 자신은 일강수(一江水)라고 하지 않았던가. 달빛은 반강수(半江水) 뿐인데 말이다. 이마를 치며 그는 부랴부랴 길을 되짚어 천태산으로 올라갔다. 허겁지겁 절에 다다른 그는 담벼락의 시를 찾았다. 그러다가 깜짝 놀랐다. 그가 써놓은 시 속의 '일강(一江)'을 누군가가 반강(半江)으로 벌써 고쳐놓은 것이 아닌가. 일(一)에서 한획을 다시 긋고 세로로 줄을 그은 뒤 양쪽에 점 두개를 찍어서 말이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급히 절로 뛰어들어가 수소문을 했다. 젊은 스님 하나가 대답했다. "아까, 선생님이 내려가신 뒤에 노인 한분이 그 담벼락에 오래 서있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사람이던가?" "회색 눈썹에 회색콧수염을 가진 호리호리한 분이었습니다." 임번은 마을로 내려가 백방으로 그를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중국에서 몰려오는 황사로 연일 하늘이 부옇다. 그날의 기사는 황사 속에 구제역의 발병인자가 함께 실려올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복지부에선 서둘러 축산농가에 비상령을 내리고 구제역 방역에 온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황사에 구제역 실려올라' 그렇게 달아놓고는 제목이 왠지 싱거워보여서 뒷말을 조금 바꿔본다. '황사에 구제역 묻어올라' 맛은 훨씬 좋아졌는데, '올라'로 끝난 것이 왠지 수다스러워 보이고 한가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데스크에 이 제목을 슬쩍 밀어놓는다. 대장(臺狀)에서 고쳐진 제목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란다. 선배는 황사 뒤에 있는 문장들을 모두 지우고 앞에다 세 글자를 집어넣었다. "음메에! 황사" 사람이 주어가 아니라, 가축이 주어였다. 전해 구제역 때문에 집단도축의 공포를 이미 맛본 소들이니 황사가 두렵기도 하리라. 저 소의 목소리 하나로 그날 지면은 생기 넘치는 가축적인(!) 분위기를 창출해냈다. 아! 선배. 정지상과 김부식은 영원한 라이벌이었다. 시에서는 정지상이 한수 위였는데 김부식은 그런 그를 무척이나 질투했다고 한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산사를 찾아 나들이를 갔다. 거기서 정지상은 이런 싯귀를 얻었다. 임궁범어파 琳宮梵語罷 산색정유리 山色淨琉璃 (절에서 독경소리 그치자 / 산빛은 고요해 유리같네) 청아한 독경소리가 마음의 허공을 울리다 마침내 그윽하게 그치는 순간과 산빛의 고요함이 유리라는 심상으로 공유되고 있는 멋진 시다. 이 시를 들은 김부식은 너무나 마음에 들어하며 자신에게 싯귀를 달라고 했다. 친구 사인데 돈받고 파는 것도 아니고 그냥 준다고 하면 될 터인데 정지상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절대로 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몇번을 조르다 김부식은 홧김에 정지상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만다. (설마 그랬을라구. 뒷사람이 시에 관한 얘기를 극적으로 만들어보려고 꾸민 소설임에 틀림없으리라. 어쨌거나 정지상은 김부식보다 먼저 죽었다.) <2편에 계속됩니다> 이상국 편집부장 isomi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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