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제각각의 이유에서 자기 목숨을 끊는다. 여기까지 이르는 상황이 다양하여, 싸잡아 강퍅한 심성이라 하기도 어렵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흔히 보도되는 비리 연루자이다. 자업자득이므로 입시의 압박을 못 이긴 중고생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겪고 있거나 조만간 닥칠 비인간적인 상황을 회피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피해자연하면 정당성이 확보될 것이라는 착각과 함께 모든 것을 안고 가겠다,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자못 비장하다. 그러나 수사에 방해만 될 뿐이다. 주변이 흉흉해지는 것이야 어차피 남의 일이라 쳐도 남은 가족들은 어쩌란 말인가. 29만원짜리도 산다. 경멸의 찬탄이 집중되는 이 시대의 아이콘이다. 알고 보면 생불여사일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맞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삶에는 그 이유가 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리고 그를 (무슨 벌레같이) 기억하는 동안에는 군부 쿠데타의 위험이 덜하지 않을까? 이러한 사적인 죽음보다 심각한 것이 사회구조적 죽음들이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10년 가까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 부동의 1위이다. 통계에 의하면 2011년에 10만명당 31.7명, 그중에 남자가 43.3명, 여자가 20.1명이다. 남자가 두 배 많은 것이 특이사항은 아니다. OECD 국가에서 보통 서너 배, 러시아나 그리스 같은 나라에서는 여섯 배까지 차이가 난다. 노인의 자살률은 보다 심각하다. 65세 이상에서 10만명당 79.7명, 그중에 남자 128.6명, 여자 46.1명이다. 80세 이상으로 가면 더욱 높아진다. 10만명당 116.9명, 그중에 남자가 무려 209.2명, 여자가 79.6명이다. 2011년이 특이한 해가 아니다. 자살률은 그냥 꾸준히 증가해 왔다.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이라는 독일 영화가 있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 줄거리의 모티브는 동독 주민의 자살률이다. 자살률은 체제 정당성에 대해 네거티브한 지표가 되기 때문에 통계치를 은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전대미문의 높은 자살률 앞에서도 덤덤하다. 한(恨)이라는 특유의 자학적 리액션이 한 자락 깔리는 우리네 정서를 공격성이 강한 인종의 자기방어 성향과 평면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짚을 것은 짚어야 한다. 노인들의 자살이다. 칠십을 살았다면, 팔십을 살았다면, 세상과 공존하는 법도 알 것이고 관성처럼 삶에 대한 의지도 강할 것이다. 무엇보다 죽기도 귀찮고, 그런 결기를 부릴 엄두도 내기 어려운 나이이다. 그런 모진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으리라. 하지만 고려장보다 더한 무관심과 유기라고 자손을 탓하기도 어렵다. 평균수명이 늘어났지만 갑자기 뾰족한 노후 보장 수단이 생길 리 없고, 가정 내에서 봉양하기도 점점 버거워진다. 가족관계 내부에 사회보장의 역할을 떠맡길 수 없는 시대이다. 가족이 해체되고 있지 않은가. 노인의 자살에 대해서는 이제 공동체가 나서야 한다. 야만의 사회가 되지 않으려면…. 지난겨울은 몹시 추웠다. 고독사라거나, 동사라거나 여하튼 노인들의 죽음이 많이 보도되었다. 이렇게 야만에 내몰린 죽음은 실상 자살이나 다름없다 할 것이고, 설령 겨울을 났다 하더라도 많은 경우 유감스럽게도 결국 자살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로든 별도로든 통계에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여 올해 통계에서 노인 자살률이 떨어진다면, 노인 복지가 향상된 징표로 활용되리라.김환학 서울대 행정연구소 특별연구원<ⓒ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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