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詩]최서림의 '푹'

'푹'이라는 말의 품은 웅숭깊고도 넓다 둥글어서 뭐든지 부딪히지 않고 놀기에 좋다 묵은지 냄새가 담을 넘어가는 이 말은 시(詩)가 알을 슬기에 딱 좋다 뭐든지 푹 익은 것은 시가 되는 법, 항아리 속에서 멸치젓같이 푹푹 삭고 있는 마을마다 시가 넘실대던 시절이 있었다 집집마다 다른 손맛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속을 삭히고 말을 삭히는 솜씨 따라 하늘과 땅의 기운을 빌려 오는 솜씨 또한 달랐다 청도에 가면 파리 잡는 끈끈이가 바람에 흔들리는 추어탕집이 있다 성미 급한 시간조차 한 숨 푹 자고서 가는 반질반질 닳은 마루가 있는 집, 소금같이 짠 김치 한 종지에 손님이 파리떼처럼 득시글거린다 울퉁불퉁한 세월 따라 곰삭은 인생, 할머니가 담그는 멸치젓갈의 비결은 그 집 며느리도 모른다 아직 푹 빠질 줄 몰라서이다■ '푹'은 무엇의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인데, 그것이 시간을 만나면 이렇게 곰삭기도 한다. '푹'이라고 발음해 보면 저절로 숨을 한껏 내쉬게 되어 마음이 느긋해진다. 이 한 글자 속에 담긴 지혜가 이 땅의 음식맛을 만들었다. 발효를 활용한 젓갈이나 된장과 푹 끓이고 곤 국물이 오랜 인생의 손끝에서 감동적인 맛을 생산한다. 많은 시들은 경쾌하고 풋풋한 겉절이지만, 생각을 오래오래 삭히고 언어를 느긋하게 고아 끓여 낸, 한 그릇의 시에는 진한 감동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무릎을 칠 만한, '푹'의 시론(詩論)이 맛깔스럽게 마음을 사로잡는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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