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모르는 풀꽃이여, 이름을 받고 싶겠구나/내 마음 어디에 자리하고 싶은가/이름 부르며 마음과 교미하는 기간,/나는 또 하품을 한다//모르는 풀꽃이여, 내 마음은 너무 빨리/식은 돌이 된다, 그대 이름에 내가 걸려 자빠지고/흔들리는 풀꽃은 냉동된 돌 속에서도 흔들린다/나는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짐승이다//흔들리는 풀꽃이여, 유명해졌구나/그대가 사람을 만났구나(......) 황지우 '게눈 속의 연꽃.1'중에서 ■ 1990년에 발표된 이 시는 김춘수의 '꽃'(1952)을 읽고 자란 세대의 헌사의 냄새가 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다만 존재에 속하는 부차적인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이름이, 김춘수에 와서 존재를 생성하는 창조와 개념의 원천이라는 발상으로 뒤집혔을 때, 망치로 한 방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황지우는 그 충격을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는 소박한 중얼거림으로 돌려주고 있다. 그는 그러나 존재보다 크게 보였던 이름을, 다시 마음의 폴더 하나에 가볍게 들여앉히고 있다. 김춘수의 꽃은 원형과 보편이었지만 황지우의 들꽃은 어쩐지 세속과 체험의 냄새가 난다. 그에게 시를 인정받고 싶은 어느 여인이 떠오르면서 장면들은 제법 구체적인 비주얼이 될 듯하다. 하지만, 마음과 이름이 겹쳐졌다 하더라도, 같은 것이 된 건 아니다. 식은 돌처럼 굳은 마음 안에 들어 있는 이름의 고통과 망념. 그는 돌을 깨어 불을 꺼내 가는 원시의 사내처럼 그 이름을 가져가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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