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4장 낯선 사람들 (70)

하림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자 이장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수도 고치는 데는 내가 아니까 전화를 해보겠소. 얼마가 들진 모르겠지만.....” 하고 말했다. 하림은 별 수 없이 다시 윤여사에게 전화를 걸어보는 수 밖에 없었다. 전화를 받은 윤여사는 옆에 이장이 있으면 좀 바꾸어달라고 했다. 전화를 받은 이장은 응, 그래, 예, 맞어. 걱정마. 알았어요, 하며 반말과 존댓말을 반반씩 섞어서 대답하고는,“씨펄, 내가 지 종인가? 이래라 저래라 하게.”하고 혼잣말처럼 구시렁거렸다.그리곤 곧 이어 핸드폰을 뒤적여 읍에 있는 펌프 수리점 전화번호를 찾았다. 수리점이 나오자 이장은 갑자기 무게를 잡고 말했다.“아, 여기 살구골 이장인데, 응, 나 운학이, 수도가 얼어터졌는가 싶구먼. 빨리 좀 와주소. 오전 중으로 와. 급하니께. 알았어!”그렇게 급할 것 하나 없는 일을 가지고 급한 것처럼 다그쳤다. 수리점에 전화까지 넣고 나자 이장도, 하림도 더 이상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하림은 자기가 어디까지나 이곳에는 손님에 불과하며, 따라서 수도를 고치든 말든 자기에겐 아무 책임도 없다는 사실을 이장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싶어서 그가 그러는 동안 짐짓 뒷짐을 진 채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혹시 마시다 남은 술 없수?”할 일 없으니 염불이라고 이장 운학이 말했다.“소주팩 가져온 게 있는데.... 드실래요?”하림이 말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여기 올 때 혼자 홀짝거릴 참으로 넣어온 것이었다.“아무거라도 좋수다. 난 청탁을 가리는 사람은 아니니까.”운학이 젠 체하고 대답했다.하림은 다시 물통을 들고 화실 현관 쪽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운학도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따라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온 운학은 이곳이 처음인 듯 강아지 새끼처럼 킁킁거리며 사방을 먼저 한번 둘러보았다. 하림이 가방을 뒤져 소주팩 세 개를 꺼내어 탁자 위에 놓고, 컵과 안주거리로 일회용 포장 김을 들고 왔다.“라면 없수? 소주 궁합에는 라면이 젤 인데....아침부터 힘썼더니 어쩐지 출출하구먼.”하고 말 타더니 경마 잡히더라는 옛 속담대로 운학이 의자에 앉으며 체면없이 내뱉었다. 하림은 가타부타 말없이 냄비에 조금 전에 떠 온 물을 붓고, 가스불에 올린 다음 박스에서 라면을 꺼내었다.“잘 아시겠지만, 윤재영이 지금 나이 들어 그렇지 예전에는 꽤나 얼굴 값 하고 다녔다오. 그림인가 뭔가 그리지, 자기 아버지 고물상 해서 돈도 많지, 하여간 잘 나갔어요.”물이 끓는 동안 운학은 컵에다 소주를 따라 놓고 홀짝거리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림은 그의 말을 한 귀로 들으며 라면 포장을 뜯었다.“나두 한때 좋아한 적이 있었소만.” 그리고나서 컥컥거리며 기괴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내 다리만 이렇게 되지 않았어두..... 아니야, 멀쩡했어두 난 아니야. 그 앤 욕심이 너무 많아. 거들먹거리는 꼴도 보기 싫었구.”그리고나서 갑자기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하림을 바라보며,“근데 장하림이라 했나요? 그냥 부르게 좋게 앞으로 장선생이라 하겠소. 그래, 장선생하군 어떤 관계요?”하고 느닷없이 물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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