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6년 총열공방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변신...15대孫이 투명·상생경영
[아시아경제 박희준 기자]이언 플레이밍 원작 소설을 영화한 'OO7' 시리즈의 1950년대 영화와 1980년대와 1990년대 나온 미국 할리우드의 코믹 범죄 수사물 '리셀 웨폰' 시리즈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있다. 바로 권총이다. 초기 007 영화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는 베레타 권총 한자루를 호신용으로 감추고 다니고 리셀웨폰의 주인공 마틴 릭스 형사는 베레타 권총으로 범인들을 날려버린다. 이 권총들은 이탈리아 총기제조회사 '파브리카 다르미 피에트로 베레타'(이하 베레타.로고 아래)가 생산한 것이다.
세개의 화살로 표현된 베레타 로고
베레타는 15대째 가업을 이어 각종 총기를 생산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가장 오래된 총기회사이자 산업왕국이다. 근 500년간 가족기업 형태를 유지하면서 총기제작이라는 한 우물을 팠다. 베레타는 현재 권총과 라이플,사냥총 등을 하루 평균 1500정 생산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75%를 100여개국에 수출하고 있다.생산하는 총기의 85%는 스포츠용 총기다. 2011년 기준매출은 베레타 1억6370만 유로를 비롯, 그룹 전체 4억8180만 유로를 기록했다. 베레타는 9mm 권총을 이탈리아 경찰은 물론,프랑스의 전투경찰,미국 텍사스 경찰조직인 텍사스 레인저스,미국 육군과 해군,캐나다 국경수비대,스페인과 터키 경찰 등에 공급해 권총의 명가로 자리매김했다.
트롬피아 계곡 가르도네시의 베레타 사옥 전경
베레타는 이탈리아 알프스 산기슭에 자리잡은 브레시아 지방의 소나무가 울창한 트롬피아 계곡(Val Trompia)의 가르도네라는 소도시의 공방으로 출발했다. 총기장인 바르톨로메오 베레타가 이곳에서 나오는 풍부한 철광석을 녹여 화승총 총열을 만드는 제조장을 만든 게 시초다. 당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한창 걸작품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바르톨로메오가 1500년대 초부터 생산하고 있던 화승총은 뛰어난 품질을 인정받아 주문이 쏟아졌는데 베네치아 공화국도 구매자였다. 바르톨로메오가 베네치아 조병창에 화승총 총열 185개를 납품하고 296두카트를 받은 1526년10월3일자 영수증이 현재 가드로네 본사에 보관돼 있다.베레타가문은 이날을 창업일로 삼고 있다. 무려 487년의 역사다.200년 이상된 기업만 회원으로 있는 에노키앙 협회 정회원사다. 그동안 전쟁이 있는 곳에는 항상 베레타가 있었다. 전쟁광 나폴레옹은 1798년 프랑스혁명후 베레타 총으로 무장한 군대로 유럽을 석권했다. 1차 대전때 이탈리아군은 베레타의 경기관총으로 무장했으며, 2차대전 당시 무솔리니는 베레타 총을 믿고 전쟁을 시도했다. 또 일본은 1938년 상륙군 무장을 위해 베레타에서 소총을 직접 수입했다. 1985년 미국은 콜트 45 구경 권총 대신 베레타의 9mm M9을 휴대무기로 선정해 50만정 5600만 달러어치를 사서 걸프전에 참전한 병사들이 소지하도록 했다.미국 총기역사에서 '1985년 쿠데타'로 불리는 사건이다.
베레타의 9mm권총 92FS
바르톨로메오의 후손들은 가르도네 본사 정문 위에 새겨진 '신중함과 대담함'이라는 두 단어를 실천해 회사를 위기에서 구하고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가문의 상징인 '삼지창'에 담긴 뜻대로 표적을 맞췄다.
베레타 가문 가계도
바르톨로메오의 증손자 지오반니 안토니오는 후미장전식 대포를 만들어 해군 전투에 근본적인 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대포를 베네치아 정부에 제안해 1641년부터 20년간 베네치아 정부로부터 매월 10두카트의 금화를 보조금으로 받은 것은 좋은 예이다. 그런 예는 또 있다. 1815년 워털루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할 때쯤 가르도네를 포함한 롬바르디아 지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로 편입돼 시련을 맞이했는데 당시 가문 수장인 피에트로는 총열 제조만 하던 회사를 총기 전체를 생산하는 회사로 바꾸고 엽총을 개발하는 한편,회사를 근대적 체제로 전환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의 아들 주세페는 베레타를 국제기업으로 변신시켰다.주세페의 뒤를 이은 피에트로2세는 1800년대 말부터 1900년 대 초까지 최신 생산법을 도입해 베레타를 장인기업 수준에서 산업혁명의 선두주자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베레타는 전세계 수요를 충당하느라 공장을 세배나 늘려야 했다. 자유주의자였던 피에트로와 그의 아들들(사진 아래)은 2차 대전중 독일 나치와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의 핍박을 받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문 저택은 독일과 이탈리아군인과 기술자들에게 넘어갔고 총기생산시설은 연합국 공습을 피하기 위해 터널으로 옮겨졌다. 전쟁말기 피에트로는 나치에 체포됐다가 이탈리아 빨치산에 의해 석방돼 목숨을 건졌다.
1956년 촬영된 피에트로 베레타(가운데) 아들 카를로(왼쪽)와 피에르 주세페 베레타
1957년 피에트로가 죽자 회사 지분은 아들 주세페와 카를로,딸 주세피나,그리고 몇 명의 조카에게 분산됐지만 피에트로의 아들이 회사를 장악했다.카를로는 1984년 죽을 때까지 회사 관리책임자로 일했고, 주세페는 1993년 세상을 뜰 때까지 사장을 지냈다. 두 형제에게는 아들이 없었다.카를로는 여동생의 아들인 조카 우고 구살리를 양자로 입적해 베레타 성을 붙여 가문의 대를 잇게 했다.
베레타 갤러리 런던 전경.이곳은 규제 때문에 총기를 팔지 않는다
우고(77)는 1993년 사장겸 최고경영자(CEO)에 취임해 10년째 두 아들 피에트로와 프랑코와 함께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그는 1995년 회사를 지주회사 체제로 개편하고 지주회사 베레타 홀딩의 회장이 됐다.우고는 좋은 판매조직에 기업 성공열쇠가 있다고 보고 전세계로 판매망을 확장했다.악세사리와 사냥복,아웃도어 스포츠 용품 회사를 차례로 편입했다.현재 계열사는 18개다. 그는 품질제일주의를 추구하고 적당주의는 용납하지 않았다.의사결정을 단순화하는 경영이야말로 베레타의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경영철학도 수립했다.
우고 구살리 베레타와 두 아들 피에트로와 프랑코 구살리 베레타
베레타 가문은 현재 가업을 이어갈 후계자를 양성하고 있다. 우고의 아들 피에트로는 지주회사의 예산기획,투자계획 등을 맡고 프랑코는 미국 판매를 전담하고 있지만 가문 후계자는 정해지지 않았다. 베레타가문은 상생 경영에도 소홀하지 않다.1300명의 직원 안전과 복지를 돌보고 열매를 지역사회와 나누는 것을 기업의 책임으로 여기고 있다. 가르도네 지역사회 학생을 위해 휴일 캠프를 열고,직원을 위한 해변 호텔,탁아소,양로원을 만들어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베레타 암연구재단이다.GM과의 분쟁종결 협약에 따라 생긴 50만 달러를 출연해 만든 재단이다. 가족기업 연구의 대가인 미국 브라이언트 대학 가족기업연구소의 윌리엄 오하라 소장은 '수세기에 걸친 성공'(한국에서는 '세계장수기업,세기를 뛰어넘는 성공'으로 출간)이라는 저서에서 "베레타는 1526년 이래 대담하게 시장을 확대해왔으며 품질에서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유행하는 경영이론을 따라 가치관을 바꾸지 않는 신중함을 지켜왔다"면서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망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그는 "베레타는 절대 스크랩속에서 찾아볼 수 잇는 기업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극찬했다.빠른 의사결정과 투명성,상생경영과 쇄신은 500살 기업 베레타가 늙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젊은 기업으로 남을 수 있는 비결인 셈이다.박희준 기자 jacklondon@<ⓒ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국제부 박희준 기자 jacklondon@ⓒ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