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엔영화]더 늦기전에 올리는 위령제..'지슬'

제주 4.3사건 다룬 흑백영화..제주방언 '지슬'은 당시 피난간 사람들이 나눠먹었던 감자다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오멸 감독의 '지슬'이 보여준 성과는 놀랍다.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것도 모자라 프랑스 브졸국제영화제에서는 황금수레바퀴상을 받았다. 국내에서도 2012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 시민평론가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 CGV 무비꼴라쥬상 등 4관왕에 오른 전적이 있어 해외 유수의 영화제 수상은 어찌보면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개봉도 하기 전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지슬'은 마냥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볼 영화는 아니다. (이미 제주도에서는 앞서 1일 개봉했고 나머지 지역은 21일 개봉이다.) '지슬'이 배경으로 삼은 시대는 1948년 11월이다. 영화는 숫자로만 외우고 있던 '제주 4.3' 사건을 뼈와 살이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전환한다. 근현대사의 한 부분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아버지 세대들이 멀지 않은 과거에 겪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비극이 극대화된다. '해안선 5km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하라'라는 미국의 소개령이 한 마을을 덮친다. 폭도가 뭔지, 빨갱이가 뭔지도 모른 채 주민들은 무작정 살기 위해 산 속 '큰넓궤동굴'로 피난간다. 큰넓궤동굴은 실제 제주4.3 당시 주민들이 50~60일 동안 숨어지내던 곳이다. 한 겨울 그 춥고 캄캄한 동굴에서 그들이 나눠먹었던 게 삶은 감자, 즉 제주 방언으로 '지슬'이다. 감자를 먹으면서 이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순박하고 일상적이다. 혼자 마을에 두고 온 어머니 걱정, 아끼던 돼지가 굶어죽지는 않았는지 하는 걱정, 행방이 묘연한 순덕이는 어디에 있는지 하는 걱정 등 내 걱정보다는 주변 사람, 동물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이 심각한 와중에도 이들의 대화는 따뜻하고, 유머가 있으면서, 실없는 웃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결국 영화는 우리가 아는 결론으로 달려간다. 제주 4.3사건의 희생자 수는 3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큰넓궤동굴로 피신한 이들의 운명도 다르지 않다. 죽어야할 명분도 당위도 없이 희생된 이들의 모습은 묵직하게 가슴에 남는다. 죽여야할 명분도 당위도 없이 '명령'에 따라야만 했던 이들의 고뇌도 뼈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백의 스크린 위에 펼쳐진 제주의 모습은 아름답기만 해 더 허망하고 허무하다.오멸 감독은 이 이름없이 세상을 떠난 희생자들에게 제산를 지내는 심정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구름 위 하늘에서 서서히 내려와 마을의 모습을 비추던 첫 장면은 마치 원혼들이 카메라를 잡고 있는 듯 하다. 영화의 형식적 부분도 제사의 절차를 따르고 있다. 신위(神位·영혼을 모셔 앉히다)에서 시작해 신묘(神廟·영혼이 머무는 곳), 음복(飮福·영혼이 남긴 음식을 나눠 먹는 것), 소지(燒紙·신위를 태우며 드리는 염원) 등 총 4개의 시퀀스가 끝나면 지방지를 태우며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무하고, 이들의 한스런 넋을 고이 올려 보낸다.'지슬'은 2시간도 채 안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이렇게라도, 또 이제라도 이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는 기회를 관객들에게 준다. 더 늦기전에 올리는 위령제인 것이다. 제주도에 관한 이야기를 줄기차게 해온 오멸 감독은 말한다. "왜 잔인한 역사를, 그 통증을 다시 꺼내야 하는가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분노밖에 남을 게 없다. 잔인한 역사를 담기보단 피해자들의 영혼을 치유하며, 관객들이 그들을 위해 제사지내는 마음이었으면 한다."조민서 기자 summe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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