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악당의 케릭터가 잘 나와줘야 해. 사람들은 선한 인간보다 악당한테 더 관심이 가는 법이거든.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 더욱 사악한 힘을 발휘하는 악당, 드라큘라나 검은 박쥐, 좀비 같은 존재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사람들은 그런 악당을 통해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악당 근성을 대리 만족하곤 하지. 어둠 속에서 몰래 불을 저지르고 싶은 욕망 말이야. 악당 하나만 잘 나와 줘도 반은 성공이야.”악당이라는 말에 하림은 전직 대통령이었던 전아무개라는 사나이를 기억해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등장해 80년 내내 공포정치를 하고, 지금도 거들먹거리며 자자손손 수천억 재산을 굴리며 잘 먹고 잘 사는 사나이. 그 정도면 악당이 아니냐고 하자 배문자가 풋, 하고 웃으면서 몸을 기울여 하림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그건 악당이 아니야. 트레시, 쓰레기라고 해. 알겠니?”그리고나서 몸을 다시 쓱 뒤로 젖히면서 소리내어 웃었다.“악당에게도 철학이 있어야 해.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야망 같은 것. 지상 낙원을 만들겠다는 허황된 꿈 같은 것 말이야. 순결한 아리안족의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던 히틀러나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질서 속에 두겠다고 월가의 은행가들처럼..... 그들은 군대를 부리고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지. 세계 평화라는 이름으로 말이야. 그리고 안방 침대에 누워 델몬트 쥬스를 빨며 마치 월드컵 경기를 구경하듯 씨엔엔이 날라다주는 실시간 뉴스를 보지.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처럼 말이야.”배문자에게는 개인적인 감정을 절제하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일거리에 대해 결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충분히 상상력을 자극한 다음, 곧 본론을 꺼낼 것이었다. 그게 그녀의 스타일이었다. 배문자의 말을 들으며 하림은 예전에 미국의 이라크 침공 작전 때를 떠올렸다. 그때 하림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배문자의 말처럼 텔레비전은 이제 마악 미국이 사용하게 될 가공할만한 신무기에 대해 시시각각 전자게임이라도 하듯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폭탄은 전파발생 장치로 일순간 모든 사람을 정신착란 상태에 빠뜨릴 수 있다고 했고, 어떤 폭탄은 소리만으로 거의 사십킬로 내에 있는 인간들의 내장을 파열해 죽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신무기의 실험대상은 가련하게도 악의 축에 들어있는 이라크 국민들이었다.2003년 3월 20일 오전 5시 30분. 하림은 그날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배문자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두 사람은 같은 방에서 같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 당시 눈 뜨고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전 세계의 텔레비전으로 생중개되는 텔레비전 씨엔엔 뉴스를 통해 알리바바와 사십인의 도적들이 나오는 옛 도시 바그다드의 하늘 위로 작열하는 폭탄들의 불꽃놀이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나우, 레츠 고우!’ 부시의 한 마디에 미폭격기의 대공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증오와 죽음의 다리를 건너가 버렸던 것이다. 세상은 만화와 똑 같다. 아니, 어떤 때는 만화보다 더 만화스럽다. 만화 속 악당들보다 더 악당스러운 자들이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글 김영현/그림 박건웅오진희 기자 valer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사회문화부 오진희 기자 valere@ⓒ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