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스토리]남영驛 담벼락 옆 김근태 고문하던 대공분실이…

짓밟힌 인권, 처절했던 몸부림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을 가다김근태, 박종철이 느꼈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되뇌다

▲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의 외관 모습. 고문과 취조가 이뤄지던 청사 5층의 좁은 창문이 눈에 띈다.

[아시아경제 나석윤 기자] 1호선 남영역에 내려 걷기를 100여미터, 높은 콘크리트 벽면 철조망 사이로 검은벽돌의 건물이 보인다. 외관은 7층 높이의 기역(ㄱ)자 형이다. 겉모습과 주변 담장, 푸른색 정문만으로 ‘이곳’임을 감지한다. 서울 용산구 갈월동 98-8번지.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가들에게 탄압과 공포의 상징이었던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청사 5층의 19개 창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층의 크고 널찍한 창과 달리 가로, 세로가 모두 좁은 모습이다. 무자비한 고문과 취조가 자행되던 흔적을 감추고, 외부와의 단절을 시도하려는 당국의 구상이 반영됐다.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으로 불리는 고(故) 김수근 건축가의 작품, 고인이 설계 전 이곳의 용도를 알았는 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 후면출입구를 지나 오른편에는 5층 조사실 복도로 곧장 이어지는 71개의 원형계단이 등장한다. 조사대상자들은 중앙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이 계단을 통해 조사실로 이동했다.

뒤쪽엔 조사대상자들이 끌려 들어갔던 후면출입구가 있다. 켜켜이 채워진 벽돌 사이로 덩그러니 놓인 출입구는 문의 여닫힘 만으로 섬뜩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리고 출입구를 지나 오른편에 나타나는 71개의 철제 원형계단. 좁은 공간에 촘촘히 세워 올린 이 계단은 곧장 5층 조사실 복도로 이어지는 ‘공포의 계단’이다. 공간이 협소하고 경사가 급해 아래에선 누가 붙들려 올라가는지 분간이 어렵다. 여기에 걸음을 뗄 때마다 들려오는 계단과 구두굽의 마찰음은 무언의 공포와 불안감을 선사한다. 김근태 상임고문과 박종철 군 역시 두 눈이 가려진 채 이 동선을 따라 조사실로 올라갔다. 원형계단을 따라 5층 복도에 이르면 좌우로 위치한 15개 조사실이 드러난다. 수사당국이 반 국자행위자, 반 정부운동가 등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이른바 ‘공사(고문)’를 하던 현장이다. 각 조사실 출입문 위로는 1~15번까지의 조그만 번호표가 붙어 있다.

청사 5층의 조사실 복도. 이곳의 15개 조사실에선 가혹한 고문과 취조가 자행됐다.

복도 양 쪽에 지그재그 형태로 설치된 출입문은 같은 방향(오른쪽)으로만 열리도록 설계돼 옆은 물론 맞은편에서도 다른 조사실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다. 단지 고문과 학대에 신음하는 비명만이 들릴 뿐 누가, 누구에 의해, 어떤 고문을 당하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여기에 일반적인 현관문의 외부확인용 렌즈와 달리 이곳의 렌즈는 안에서 밖을 볼 수 없다. 밖에서만 내부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김 고문이 23일 동안 고초를 치른 곳은 5층 맨 왼편의 515호실이다. 원형계단을 올라 5층에 이른 뒤 왼쪽으로 정확히 10걸음, 중앙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면 19걸음이 떨어진 곳이다. 규모는 다른 조사실과 비교해 2배 정도 크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사건으로 알려진 509호실이 15㎡ 남짓이라면 515호실은 30㎡ 정도는 돼 보인다. 하지만 조사실 리모델링 이후 원형복원이 이뤄지지 않아 과거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 고(故) 김근태 상임고문이 고문과 취조를 받았던 515호 조사실 내부. 현재는 내부 리모델링 이후 원형복원이 이뤄지지 않아 과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3개의 좁은 창이 밖을 내다보는 유일한 통로다. 다른 대다수의 조사실 보단 창이 1개가 더 많다. 간간이 서울역과 용산역을 잇는 전철소리가 들리고, 열차의 승강장 진입을 알리는 안내멘트까지 귀에 와 닿는다. 김 고문이 발가벗겨진 채 칠성판(사람을 눕힌 뒤 몸을 고정시켜 고문할 수 있도록 고안된 고문대)과 물, 고춧가루, 전기, 고문관들에 살이 찢기고 타는 동안에도 차창 밖에선 사람들과 열차가 오가고 있었다는 얘기다. 불과 몇 미터를 사이에 두고 평범한 일상과 처참한 삶의 사각지대가 구분되던 곳이 바로 여기다. 청사와 남영역 승강장 사이에는 높은 담벼락 하나 놓인 게 전부다. 김 고문이 “고문당하는 비명소리를 덮어씌우기 위해, 감추기 위해 일부러 크게 틀어놓은 그 라디오 소리, 인간에게 파괴가 감행되는 이 밤중에, 오늘, 저 시적이고자 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회고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년) 군 고문치사사건의 현장 509호 조사실. 거짓이 사실로 둔갑하고 사실은 단숨에 왜곡되던 이 좁은 공간에서 당시 23살의 고인은 애처롭게 죽음을 맞았다.

▲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던 509호 조사실 내부. 현재는 리모델링 후 유가족들과 시민단체의 요구로 원형이 복원돼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고인이 두려움에 떨며 취조당한 책상과 의자, 불편한 잠을 청했을 간이침대, 물고문이 이뤄진 욕조와 세면대, 변기까지. 대학 3학년생 그에게 이 모든 것들은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더구나 그가 이곳에 왔을 때는 시국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한 참고인 신분이었다. 하지만 세면대의 25주기 추모식 축원문 위 앳된 얼굴의 영정사진은 아무런 말이 없다. 1976년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설립된 이곳은 1991년 경찰법이 제정되면서 경찰청 보안분실로 변경됐다. 대공분실은 1948년 10월 대간첩 수사를 목적으로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앙분실로 발족한 게 최초의 탄생이다. 현재는 지난 2005년 7월 경찰 창설 60주년을 기념해 설립된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가 입주해 운영 중이다. 고문과 취조가 이뤄지던 기관 특성상 ‘해양연구소’ 등으로 간판까지 위장했던 곳에 지금은 인권수호를 위한 경찰조직에 들어 와 인권보호담당관실 소속 14명을 비롯해 50여명이 근무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참혹했던 단면을 간직한 옛 남영동 대공분실의 36년 역사. 1983년 12월에는 5층이던 당초 건물을 증축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2012년 바로 그곳에선 인권 아카데미와 인권영화제, 경찰청 인권위원회 회의 등이 열렸다. 경찰간부들의 인권교육과 중·고교, 대학생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최근에는 한 대학병원 노조까지 현장을 찾았다. 암울했던 역사를 기억하려 올 들어서만 이곳을 다녀간 시민이 10월 현재 3214명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함께 인권 신장의 진정성 있는 노력을 보이겠다는 게 경찰의 인권센터 설립 취지다. ‘역사의 아이러니’란 말은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나석윤 기자 seokyun1986@<ⓒ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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