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선칼럼]이회창과 박근혜 이야기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띈다.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악수를 한 채 환하게 웃고 있다. 대선 정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후보 지지 선언장의 여느 풍경과 다를 바 없다. 유독 그 사진에 눈길이 간 것은 두 사람의 십수년에 걸친 인연이 생각나서다. 대선에서 세 번이나 고배를 마신 70대의 노정객, 무슨 생각을 하며 박 후보 손을 잡고 저리 밝게 웃고 있을까.  15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1997년 15대 대선에 한나라당 후보로 나섰다 김대중에 패한 이회창은 명예총재로 일단 정치전면에서 한걸음 물러난다. 재기를 노리며 세력을 다지던 그는 이듬해 '4ㆍ2 재보선'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그때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박근혜다. 박근혜는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나서 첫 금배지를 단다. 박근혜의 정계 입문은 본인의 의지에 이회창의 권유가 더해진 결과다.  하지만 박근혜는 얼마 안 가 이회창에게 등을 돌린다. 16대 대선의 해인 2002년 2월, 박근혜는 당시 총재이던 이회창의 '1인 지배'를 비난하며 탈당한다. 이회창의 지도력에 큰 상처를 낸 셈이다. 5월에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세력을 키우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결국 대선 직전인 11월 다시 한나라당으로 돌아와 이회창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그러나 이회창은 노무현에게 져 또 떨어진다. 이회창에게 박근혜의 탈당ㆍ복귀가 좋은 기억으로 남았을 리 없다. 5년 전에는 또 어떤 일이 있었나. 이회창은 16대 대선에서 낙선한 뒤 한동안 현실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 17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2007년 11월 돌연 한나라당을 탈당,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이명박 후보가 BBK사건 등으로 지지율이 흔들리고 보수 진영 일각에서 이회창 출마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진 데 고무된 것이다. 세를 확장하기 위해 당내 후보경선에서 패하며 이명박과 소원했던 박근혜의 지지를 끌어내려 공을 들인다.  그러나 박근혜는 냉정했다. 이회창이 12월 들어 세 차례나 서울 삼성동 박근혜의 집을 찾아갔지만 지지를 설득하기는커녕 얼굴조차 보지 못한다. 박근혜가 "후보경선에서 졌다고 해서 당을 탈당해 이회창을 지지하는 것은 정도(正道)가 아니다"며 아예 만나주지도 않은 것이다.  이회창은 결국 박근혜의 마음을 되돌리는 데 실패했다. 선거에서도 당초 기대에 못 미치는 15.07%의 득표율로 이명박, 정동영에 이은 3위에 그친다. 내리 세 번째 낙선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듯 시작은 좋았을지 모르지만 고비 때면 가는 길이 서로 엇갈렸다. 이회창에게 있어 박근혜는 좋은 인연이라기보다는 '악연'의 느낌이 더 강하게 남아 있을 법하지 않은가.  그 이회창이 그제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고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자신이 도움을 청했을 때 냉정하게 손을 뿌리쳤던 박근혜를 돕기 위해 5년 만에 떠났던 당을 다시 찾은 것이다. 추석 때부터 박근혜 측이 공을 많이 들이고 지난 21일엔 박근혜가 직접 이회창을 집으로 찾아가 그동안의 서운한 감정을 풀었다곤 하지만 보통 사람으로선 쉬 하기 어려운 행보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회창이 '고집 세고 남의 말 잘 안듣기로 소문난 사람'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적인 연(緣)의 고리를 뛰어넘어 나라 장래를 위해 박근혜에게 힘을 보태겠다는 대인의 풍모인지, 아니면 아직도 정치판에 미련이 남아 노욕이 동해서인지. 혹 항상 자신이 중심에 서 있던 '대선에의 추억' 때문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사족. 이회창은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제가 이루지 못한 그 꿈을 박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킴으로써 이루고자 한다"고 했다. 그가 이루고자 한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경선 논설위원 euhk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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