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영식 기자] 그녀가 아랍권 최대 은행인 사우디아라비아 내셔널커머셜뱅크(NCB)의 면접을 볼 때 면접관의 질문은 “남자들과 함께 일해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였다. NCB의 직원 약 4000명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그녀는 4년 뒤 아랍 세계에서 최초로 은행을 세우고 경영의 전면에 선 여성이 됐다. 바로 ‘사막의 장미(Desert Rose)’로 불리는 나헤드 타헤르(43) 걸프원(Gulf One)투자은행 최고경영자다.타헤르 CEO는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이자 ‘금녀의 나라’인 사우디에서 갖가지 차별과 금기를 넘어선 ‘우먼 파워’의 상징으로 통한다. 사우디의 금융중심도시 제다(Jeddah)의 킹압둘아지즈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녀는 영국으로 유학길을 떠나 랭커스터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1998년 석사, 2001년 박사 학위를 얻었다. 졸업 후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지만 그녀는 거절한 뒤 고국인 사우디로 귀국해 NCB의 선임이코노미스트로 일하게 됐다. 여성의 사회 진출에 제약이 심한 사우디에서 오로지 실력만으로 뭇 남성들과 당당히 겨뤄 얻은 성취였다.그러나 그녀는 이후 NCB를 나와 독자 행보를 걷는다. 가계대출 중심인 소규모 소비자금융(consumer loan)은 “따분하다”는 것이 최고 은행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유였다. 인맥을 동원해 그녀는 더욱 수익성이 크고 위험도 그만큼 큰 영역에 도전했다. 자본금 10억달러로 투자은행 걸프원을 세우고 직접 최고경영자로 나선 것이다.타헤르 CEO가 이끄는 걸프원투자은행은 2007년부터 중동·인도·아프리카의 기반시설 건설 프로젝트들에 투자할 약 100억달러를 모으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사우디로 오는 성지순례자들을 위한 공항 터미널 건설, 쿠웨이트의 석유화학 플랜트 건설 등에 투자했으며 아랍에미리트·바레인에서는 중소기업 투자를 위한 펀드도 조성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지난해 같은 기간 순익 120만달러에 비해 세 배 가까이 증가한 순익 320만달러, 매출은 51% 증가한 1030만달러를 기록하는 등 순항 중이다. 투자자들로부터 ‘사막의 장미’란 별명을 얻은 그녀는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100대 파워우먼, 파이낸셜타임스(FT) 선정 2009년 세계 경제계 50대 여걸 등에 뽑히기도 했다.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투자로 세워진 공항까지 혼자 차를 몰고 갈 수가 없다. 사우디에서는 아직도 여성의 운전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아랍권의 종주국으로 통하는 만큼 특히 이슬람 율법의 영향력이 크다. 아직도 일부 관공서는 여성의 출입을 금하고 있으며 여성들은 교육을 받거나 취업·여행을 할 때 남성 친인척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사우디 정부가 지난 9월부터 일부 지방선거에 한해 여성의 투표권을 허용하는 등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걸프원투자은행의 본사는 사우디보다 더 자유로운 바레인에 있다. 그러나 타헤르 CEO는 계속 제다에서 일하며 고국의 여성들이 더 활발한 사회진출에 나서기를 촉구하고 있다. 걸프원의 임직원 중 절반이 여성이지만, 그녀는 사회적 금기를 뚫고 생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수가 너무 적다고 말한다.타헤르 CEO는 여성들에게 더 많은 사회 참여를 보장해야 국가의 부도 증진될 수 있으며, 여성의 운전을 금지하는 등의 악습을 하루빨리 철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사우디같은 석유 부국에서 실업률이 10%가 넘고 빈곤률도 높은 것은 모순”이라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우디 여성들이 일자리를 갖고 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하며, 여성들이 먼저 나서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김영식 기자 grad@<ⓒ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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