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냉키가 정치권에 넘긴 공, 튈 곳이 마땅찮다

[아시아경제 이공순 기자]지난 26일(현지 시각)의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잭슨홀 컨퍼런스 연설은 두가지 점에서 특징적이다. 하나는 새로운 정책 발표나 상황인식의 변화가 없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권의 책임을 거론하며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한 것이다. 먼저 9월 하순의 공개시장위원회 (FOMC)를 기다리라고만 언급한 것은 하반기 반등 기대감을 버리지 않은 버냉키 의장이 8월 지표를 일단 확인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즉 이번 주 발표되는 8월분 고용지표, 소비자신뢰지수, 구매자관리협회(ISM) 제조업 지수 등 경기 지표를 확인 후 추가 부양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선택이다. 그러나 연준 내부의 이견이나, 양적완화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 등이 제기되는 상태에서 9월 FOMC 회의에서 파격적인 정책이 나올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앞으로의 상황 전개에 따른 구체적인 설계도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 대한 책임론과 역할 주문은 연준의 정책 한계성을 인정하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접근 방법이 모색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는 최근 미국 재계의 불만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버냉키 의장의 연설이 끝난 바로 다음날, 세계 최대의 건설중장비 업체인 캐터필러의 CEO인 도우 오버헬만은 "미국 경제가 정치권에서의 벼랑끝 전술 때문에 또 다른 불황으로 빠져들 수 있다"면서 "정치인들은 (국채발행 상한 확대 문제를)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만드는 큰 문제로 만들었다"고 비난한 것으로 29일자 파이낸셜타임즈지가 전했다. 오버헬만의 비판은 이미 이달 초 스타벅스의 경영자인 하워드 슐츠가 의회에서 양당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정치헌금을 중단하자고 제창하고, 100여명의 재계 지도자들이 이에 동참한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기존의 재정, 통화 정책이 한계에 도달한데 대한 우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오버헬만은 특히 "한국 등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을 기회를 날려버리고 있다"면서 "미국의 경쟁국들, 특히 중국은 다른 국가들과 자유무역협정을 계속 체결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미국의 대내외 정책에서 단호한 행동을 촉구했다. 이같은 재계의 정치권에 대한 압력은 연준이 취할 수 있는 행보는 제한적인데 반해, 국가 부채 문제로 정부의 재정정책 또한 난항에 처해있는데 따른 위기감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날 파이낸셜타임즈지의 칼럼니스트 클라이브 크룩은 버냉키 의장의 처지를 "딱한 일"이라고 평하면서, 이번에 추가적 양적완화 조처를 발표하지 않은 것은 아까운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라고 주장한 것에서도 이같은 답답함을 읽을 수 있다. 현상황에서 연준이 내놓은 처방은 의회와 정부에게 은행에 쌓여있는 막대한 유동성이 실물경제로 돌 수 있도록 추가적인 경기부양책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미 지난 7월부터 백악관은 경기부양책을 검토해왔고 지난 18일에는 오바마 대통령과 버냉키 의장이 만나 어느정도 조율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다음달 5일 오바마 대통령이 발표할 것으로 예상되는 추가 부양책은 실업급여 법안을 추가로 연장하는 것과 모기지 상환이 어려운 가계를 대상으로 대출조정(refinancing)을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경기부양책의 핵심으로 꼽히는 주택 대출조정은 이미 지난 2009년 시행했던 정책의 재탕이다. 당시 이 정책은 월 납부금 부담은 줄여주지만 채권추심을 전제(recourse loan)로 한데다가 자격 조건도 까다로와 거의 실효를 보지 못했다. 만일 이 조건들을 대폭 완화한다면 효과는 볼 수 있겠지만, 그만큼 대출 은행의 위험부담도 커지게 된다. 이미 연준과 백악관은 이같은 위험을 무릅쓰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연준은 지난 2/4분기부터 은행권에 대한 대출 규제를 대폭 완화했고 이 때문에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지난 2008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같은 부실 대출을 우려한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실업급여 지급 연장안은 다음달부터 본격화될 의회의 상하 양원 예산특위(super-committee)의 예산안 삭감책과 연계되어 있어, 실행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이다. 결국 올 가을의 미국 의회는 재계의 압력과 대중의 반발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현재로서는 정부나 연준 모두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에, 전략비축유 방출과 같은 '행정조처'를 통한 물가 통제나 규제완화를 통한 잠재적 부실대출 독려를 통한 강제적 경기부양 시도는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판 관치로 한발 나아가는 셈이다 이공순 기자 cpe101@<ⓒ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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