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아시아경제 김효진 기자] 2009년 10월 미국 동영상 포털사이트 '유튜브'에 공개된 한 화면이 전세계 네티즌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장소는 스웨덴 스톡홀롬의 한 지하철역. 사람들은 에스컬레이터와 나란히 자리한 '피아노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편안한 에스컬레이터를 외면하고 흥미로운듯 피아노계단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 계단은 운동량이 부족한 도시인들을 조금이라도 더 걷게 만들고 전기를 아끼기 위해 발을 내디딜 때마다 피아노처럼 소리가 나도록 특별히 고안된 장치였다. '결핍'에서 '창의'가 피어오른 대표적인 사례다. 창의의 바탕인 결핍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대표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그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결핍을 언급했다. 자녀에게 결핍을 가르치라는 얘기였다. 뭔가 부족한 상황이 창의를 끌어내는 것이고,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된다는 게 빌 게이츠 구상의 배경이다. 3ㆍ11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태라는 사상 초유의 위기에 봉착한 일본. 위기에서 비롯된 전력의 결핍과 불편은 빌 게이츠의 말대로 일본인들의 창의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전기를 아껴 새로운 생활양식을 만들고 여기에서 '값어치 있는 아이템'을 창출해보겠다는 작은 아이디어들이 그것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결핍이 빚어낸 제2ㆍ제3의 '피아노계단 전주곡'이 흘러나오고 있다.◆"열차 안이 왜 덥냐고?..이걸 한 번 보세요"=일본인들의 창의는 거창하거나 심오하지 않다. 스톡홀롬 피아노계단처럼 소소하고 간단하며 일상과 맞닿아 있다. '탈(脫)원전' 집회가 한창이던 지난 12일 오후 일본 도쿄 신주쿠역. 이 역의 개찰구 앞에 LED화면이 하나 설치돼있었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전력 제한공급이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도쿄전력이 그날 제공되는 총 전력량과 현재까지의 사용량을 시민들에게 알리려 설치해둔 장치였다. 불편을 납득시키고 양해를 구하려는, 작지만 의미있는 창의였다. 이날 신주쿠역 개찰구 앞에서 만난 도쿄 시민 스즈키 나시히로(36ㆍ남)씨는 "전력 공급이 제한돼 지하철에서 에어컨이 약하게 나올 때가 있어 불편하긴 하다"면서도 "그래도 전력 사용량 총량을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전력 공급을 제한하는 방침을 납득하게 된다"고 했다. 현재 도쿄 시내의 모든 지하철역 개찰구 앞에는 신주쿠역과 마찬가지로 전력량 정보 제공을 위한 LED화면이 설치돼있다. 도쿄와 시외를 오가는 열차의 경우 차량 내부에 설치된 TV에서 전력량 정보가 수시로 제공된다.
신주쿠역 개찰구 앞에 설치된 TV 화면. 도쿄전력이 일일 공급전력 총량과 현재 사용량을 전해주기 위해 설치한 것. 상단부터 사용율, 구체적인 사용량, 총공급량이 적혀있다.<br />
◆자판기 전원을 끄게 만든 창의적 실험=전력 사용량을 줄이도록 해보겠다는 일본인의 구상은 처절하면서도 기발하다. 후쿠시마 사태로 전력난이 심화되던 지난 4월, '자판기 왕국'인 일본의 한 20대 남성은 '한 달 동안 자판기만으로 생활하기'라는 독특한 체험에 돌입했다. 모든 생필품과 식료품을 자판기에서 조달해 한 달을 버텨보겠다는 복안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이 사례가 주목을 받은 건 지금까지 일본에서 자판기가 잡아먹는 전력량이 얼마나 막대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일본 정부는 도쿄 등 대도시에 '자판기 사용을 최대한 줄일 것'을 권고했다. 지난 11~13일 도쿄 시내에서 직접 확인한 결과, 시내의 자판기 3대 중 1대, 경우에 따라 2대 중 1대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
3.11 이후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긴급지진속보일람' 서비스 어플리케이션 '유레쿠루 콜'. 이 어플리케이션은 일본 전역에서 발생한 지진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해준다. 제일 아래 목록에 '2011년 6월10일 06시 03분 16초에 치바현 동북쪽에서 최대진도4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재난이 만든 상품 '지진 감지 애플리케이션'=대재앙을 맞은 일본인의 창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의 불안과 결핍은 곧장 '돈 되는 아이템'으로 발현됐다. 지난 10일 저녁 도쿄 신주쿠의 한 작은 식당을 채운 사람들. 이들 중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진 정보를 제공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지진 소식을 알린 건 '유레쿠루 콜'이라는 이름의 지진 경보 애플리케이션이다. 화면에는 '2011년 6월10일 6시 3분 16초에 치바현 동북쪽에서 최대진도4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식의 문구가 실시간으로 등록되고 있었다. 이날 식당에 있던 한국인 유학생 이민주(32ㆍ여ㆍ도쿄대 대학원)씨는 "3ㆍ11 사태 뒤 이 애플리케이션 다운로드 건수가 200만건을 훨씬 넘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제 주변 사람들 중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사람은 모두 이 애플리케이션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전력난, 마케팅의 수단이 됐다=일본의 창의는 지하철역과 자판기, 스마트폰을 넘
신주쿠 중심에 있는 전자상가 빅카메라(BIG CAMERA) 입구에 붙은 절전 광고판. '절전!'이라는 구호와 함께, 전력을 최대 78%까지 아낄 수 있는 주력상품 홍보문구가 적혀있다.<br />
어 전자상가로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전력난이 마케팅 아이디어를 이끌어냈다. 이른바 절전마케팅이었다. 11일 오후 찾아간 도쿄 신주쿠의 유명 전자상가 '빅카메라(Big Camera)' 입구에 걸린 간판에는 '절전!'이라는 구호와 함께 주력 상품의 전력소모 감축 비율 등이 적힌 광고판이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입구 뿐만이 아니었다. 가전매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주변 벽은 전력을 50% 아낄 수 있는 LED TV 등 절전상품에 대한 홍보물, '절전생활응원'이라고 적힌 캠페인 포스터 등이 곳곳에 붙어있었다. 이런 흐름을 반영하듯, 구석으로 밀려났던 선풍기가 대표적인 절전상품으로 발돋움해 매장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빅카메라의 주력 품목인 세탁기의 경우 거의 다 절전시스템이 갖춰진 상품이었다. 친환경 모드로 설정을 해놓으면 같은 양의 빨래라도 물이 더 적게 들고 통의 회전수도 줄어들어 전기를 아끼는 방식이다. 대표적 '전기도둑' 냉장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절전상품임을 알리는 홍보물이 덕지덕지 붙은 이 매장의 냉장고는 문을 열었다 닫았을 때 일시적으로 냉매가 많이 분출되고 보통 때에는 음식이 상하지 않을 정도의 냉매만 내뿜는 인기 절전상품이다. ◆"절전상담 받아보셨나요?"=이 매장에는 심지어 '절전상담카운터'까지 있었다. 물론 3ㆍ11사태 뒤에 생긴 장소다. 점원들은 이곳에서 '현재 사용중인 어느 제품을 어느 절전상품으로 바꿀 경우 장기적으로 얼마 정도 이득을 본다'는 식으로 컨설팅을 해 소비를 유도한다. 빅카메라 점원 나카야마 히로시(32)씨는 "사실 요즘은 우리 매장에서 파는 대부분의 전기제품이 절전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객들도 당연한듯 절전상품에 먼저 관심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도 전략적으로 그런 상품들을 배치해두고 절전 상품에 대한 홍보도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면서 "절전상품들의 판매율은 3.11사태 이후 약 30%정도 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절전상품에 할인을 더 많이 적용해서 팔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력난을 역이용한 빅카메라의 창의는 곧장 돈과 연결되고 있었다.도쿄=김효진 기자 hjn2529@<ⓒ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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