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DVD삐라 등 제작
[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30대 중반을 넘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삐라는 어릴 적 동네어귀에서 주워 파출소에 갖다주며 신고한 뒤 보상으로 만화책이나 연필 등을 받았던 것들이다. 하지만 종이삐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IT와 접목돼 'DVD삐라'로 변했다. 대북풍선단 이 자체 제작한 DVD영상물을 풍선에 매달아 날려보내기 시작한 것. 대북풍선단 이민복대표이 지난 2월부터 날려보낸 'DVD삐라'는 총 400여장으로 100달러가량의 GPS추적기까지 장착해 추적도 가능하다. 'DVD삐라'는 추적결과 최대 평양인근까지 배포가 가능했다. DVD플레이어가 보급된 북한에서도 김정일의 호화생활 등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최초 삐라모델은 1945년 해방 이후 제1공화국 수립 시기이다. 1948년 8월 제헌국회가 친일파를 청산할 목적으로 반민족행위 처벌법안을 제정했을 때였다. 이 법안통과를 지켜볼 수 없었던 친일파들은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라는 내용으로 삐라를 국회 본회의장에 살포했다. 이후 삐라살포는 6.25전쟁이 반발하면서 대남, 대북 살포로 이어진다. 1970년대 말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심리전 총국에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대화에 물꼬를 트기 위한 타개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한다. 심리전 총국은 대만에 있는 대륙공작대의 사례를 보고 아이디어를 착안해 낸다. 대만의 대륙공작대는 풍선에 육포, 기름 등의 식료품을 실어 중국본토에 보냈다. 당시 심리전 총국은 육포와 기름대신 북한제 '천리마 라디오' 와 똑같이 생긴 라디오를 제작해 북한에 보냈다. 삐라는 이후 20년 동안 선전 전단지가 북측에 날아갔다. 하지만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가 남북정상회담 직전인 2000년 4월 '삐라 살포를 금지해 달라'는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한국군도 대북심리전을 위해 방송을 했다. 대북 라디오 방송은 6.25전쟁이 끝난 1962년부터 시작됐다. FM방식으로 송출된 방송은 확성기를 통해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퍼졌다. FM라디오 수신기를 이용해 방송을 들었다는 귀순자, 탈북자의 진술이 쏟아졌다. 하지만 지난 2004년 6월 15일 42년간의 방송을 끝으로 대북라디오방송은 끊겼다.그러자 민간단체가 주도해 전단지를 날리게 된 것이다. 민간단체가 날린 것은 지난 2000년 남한으로 귀순한 자유북한운동연합의 박상학 대표와 1995년 탈북한 기독교탈북인연합회 이민복 대표가 주축이 돼 2004년부터 북측을 향해 풍선을 날렸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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