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석기자
김영철 사장(앞줄 맨 왼쪽) 등 동국제강 임직원들이 당진 후판 공장에서 생산된 시생산 제품을 박수치고 있다.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아내의 반지를 팔아서라도 투자하겠다."동국제강 그룹의 2대 회장인 장상태 회장이 후판사업에 대한 의지를 담아 던진 말이다.최근 당진 공장 준공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고 있는 동국제강은 우리나라 후판사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지난 1954년 순수 민간 자본으로 설립된 국내 최초의 철강사인 동국제강은 전기로 제강사업으로 기반을 다지고 있던 1971년 2월 국내기업중 처음으로 후판사업에 뛰어들었다. 부산제강소에서 그해 2월 연산 15만t의 후판 공장을 준공해 생산을 개시한 것.당시 만해도 척박했던 한국 경제 여건에 특히 중화학공업이 전무해 후판 수요를 장담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후판사업에 뛰어든 것은 사운을 걸어야 할 모험이었다.창업자였던 장경호 회장과 당시 일선에서 경영을 총괄하고 있던 아들 장상태 사장은 "향후 중화학공업의 육성이 필요하고 그에 따른 후판이 필요해 질것"이라면서 당시 철강업계 주류였던 봉강제품에서 판재류 사업으로 사업을 확장키로 했다. 부자 경영진의 판단은 적중해 이듬해인 1972년 포스코의 후판 사업 진출을 이끌어냈고, 정부의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후판 시장은 크게 확대됐다.1980년대 들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회장을 맡은 장상태 회장은 부산 제강소를 포항으로 이전해 대규모 제강소를 건설하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포항으로의 이전은 당시 돈으로도 1조원이 필요한 거대 사업이었다. 당연히 내부의 반발은 거셌고, 일부 임원들은 장상태 회장에게 앞으로 후판 수요가 뒷받침해줄 수 있을 지 확신을 갖고 있느냐고 따지기까지 했다.이에 대해 장상태 회장은 "앞으로 조선산업 등이 성장할 텐데 이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며 "아내의 반지를 팔아서라도 투자하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1991년 준공된 포항의 1후판 공장과 1998년 2후판 공장이 완성돼 연산 250만t 규모의 후판 생산능력을 갖추게 됐다. 장상태 회장이 타개한 2000년 이후 실제로 한국의 조선산업은 급성장했다. 덕분에 동국제강은 1994년 매출 9000억원 수준에서 2008년 5조6000원 규모로 성장했다. 그제서야 동국제강 임직원들은 선대 회장의 선견지명이 옳았음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