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2조2000억원으로 늘린 추가경정예산(추경) 재원 조달을 위해 8조1000억원의 국채를 발행하기로 했다. 적자 국채 발행을 통한 추경으로 당초 73조9000억원으로 계획한 올해 관리재정수지 적자 규모는 84조원을 훌쩍 넘기게 됐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도 당초보다 0.3%포인트 높아져 48.4%가 된다. 재정건전성이 다소 악화하더라도 당장은 경기 회복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이번 추경 사업이 집행되면 올해 경제성장률을 0.1%포인트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전례 없는 미국발(發) 관세 전쟁의 충격과 최악의 산불 피해를 고려할 때 이번 추경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올해도 상당 규모의 세수 결손 발생이 전망되는 상황에서 추경 편성까지 이어지면서 나라 곳간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빚 추경에 관리재정적자 GDP 비율 2.8%→3.2%
정부는 18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 주재로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산불대응 및 통상·인공지능(AI) 지원을 위한 추경안'을 확정하고 22일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한 대행은 "시급한 정책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민생경제 회복의 소중한 마중물이 필요한 현장으로 적기에 투입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며 신속한 국회 통과를 호소했다.
이번 추경의 상당 부분은 추가 국채 발행을 통해 조달한다. 국채 발행 규모는 전체 추경액 12조2000억원 중 66%(8조1000억원)다. 여기에 지난해 전체 세입에서 세출과 이월액을 빼고 남은 세금인 세계잉여금 중 국가 고유재정에 쓸 수 있는 일반회계 세계잉여금 2000억원, 한은 잉여금 1조2000억원을 끌어온다.
추경 조달 주요 창구였던 세계잉여금의 사용 여력이 부족한 상황인 만큼 한은 잉여금과 기금자금을 최대한 끌어오겠다는 계획이다. 한은은 매년 외화 자산을 운용해 수익을 내고 법정 적립금 30%를 제외한 나머지를 정부 세입으로 납부한다. 한은 잉여금은 정부 세입 예상치와 실제 받는 확정치의 차이를 말하는데, 올해 한은의 정부 세입 납부 확정치가 5조4491억원(납부 예상치 4조2000억원)으로 늘면서, 초과수납분으로 1조2000억원을 확보하게 됐다.
각종 기금여유자금도 총동원된다. 지난해 소상공인시장진흥기금 1조5000억원과 주택기금 2000억원의 여유자금과 중진기금 7000억원 등 총 2조7000억원 규모다. 김윤상 기재부 2차관은 "세계잉여금과 기금여유재원 등 가용재원을 최대한 활용해 4조1000억원을, 나머지 8조1000억원은 국채 발행을 통해 충당할 계획"이라며 "추가 발행되는 물량이 풀리더라도 국채시장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진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번 추경으로 국채 발행이 늘면서 올해 국가채무는 당초 1273조3000억원에서 1279조4000억원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48.1%에서 48.4%로 0.3%포인트 올라간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2023년 46.9%에서 지난해 46.1%로 개선됐으나, 올해 48%를 넘기면서 다시 상승세를 탈 것으로 점쳐진다. 나라 살림을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 적자 규모는 73조9000억원에서 84조7000억원으로 10조9000억원이 늘어난다. 관리재정수지는 총수입에서 총지출을 뺀 통합재정수지에서 국민연금 등 4대 보장성 수지를 제외한 지표다.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도 2.8%에서 3.2%로 확대된다.
정부는 재정 악화에도 당장은 경기 회복을 위한 마중물인 재정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번 추경은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서 내놓는 역대 첫 추경으로, 2022년 5월 이후 약 3년 만이다. 김 차관은 "산불 피해 복구 규모가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미국 상호관세 발표 이후 대내외 불확실성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며 "이번 추경 외에도 필요한 경우 기금 변경 등 추가적인 재원 보강 방안도 지속 검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관세전쟁 후폭풍과 장기화한 내수 부진으로 경기 침체가 심화하는 것을 막는 게 급선무라는 설명이다.
12조2000억원 추경 어디에 쓰나
이번 추경 사업에는 관세 피해 대응과 민생 지원을 위한 대책이 대거 포함됐다. 미국 상호관세로 피해가 우려되는 기업에 15조원의 저리 대출을 제공하고, 중소·중견기업 혹은 수출 유망분야 기업에 10조2000억원에 달하는 보증보험 혜택을 준다. 위기 기업은 5000억원의 기업구조혁신펀드를 조성해 구조조정에 나선다.
통상 위기로 인한 충격을 대비하기 위해 공공 비축 예산을 4000억원으로 2배로 확대해 희토류·리튬 등 6개 핵심 광물을 조기에 확보할 방침이다. 현재도 13개 핵심 광물을 대상으로 비축이 이뤄지고 있지만, 최근 중국의 수출통제 조치로 공급망 불안 가능성이 커졌다. 비축이나 수입선 다변화가 어려운 경제안보품목에 대해서는 국가가 국내 생산비용의 70%를 2년간 보조한다. 동시에 통상위기가 고용불안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고용유지 지원금 요건을 완화하고, 지역 맞춤형 고용둔화 대응지원 사업을 새로 시작한다.
소상공인진흥기금 융자와 지역신보 보증에 2조5000억원을 확충하고 창업초기·신용취약 소상공인 2만명에 융자 5000억원을 확대한다. 중신용 소상공인이라면 6개월간 무이자 할부 혜택이 있는 1000만원 한도의 신용카드도 발급받을 수 있도록 하고, 소상공인 공공 배달 애플리케이션(앱) 이용 할인지원에 65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재해·재난 대책도 포함됐다. 산불 감시·진압장비 확충과 함께 월 4만원의 산불 특수진화대 위험수당을 신설하고, 1만5000명분에 달하는 보호장비를 일제히 교체한다. 진화 인력과 장비를 현장에 신속 투입하도록 임도는 2배 수준으로 늘린다. 이 밖에도 싱크홀 사고 예방에 1259억원을 배정해 하수관로·도로 조기 개·보수를 지원한다. 또 2548억원을 들여 4개 공항 안전시설을 보강하고 15개 조류 탐지레이더를 확충한다.
경기 진작 목적 아냐…2차 추경 가능성
정부는 이번 추경 사업이 집행되면 올해 경제성장률이 0.1%포인트 올라갈 것으로 추정했다. 김 차관은 "이번 추경의 목적이 재해·재난과 관세, 첨단산업과 관련된 지원에 일단 집중됐기 때문에 순수하게 경기 대응만을 위한 목적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는 (경기 진작에)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경기 대응 목적의 추경은 아니지만 재해·재난·관세 대응·민생 지원이 간접적으로 경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번 추경에 세입경정이 반영되지 않은 만큼 추가 추경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세입경정은 경기 상황 변화로 그해 세수가 얼마나 모자랄 것인지 가늠할 수 있어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 박금철 기재부 조세총괄정책관은 "관세정책의 향방과 내수 회복 지연이 분명히 세수 측면에서만 보면 불확실성 또는 하방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다만 지금은 4월이어서 법인세와 소득세, 부가가치세 등 주요 세목들이 얼마나 걷힐지 반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국발 관세전쟁의 불확실성과 이에 따른 경기 상황 변화도 이번 추경에 반영되지 못한 만큼 실제 세수 감소가 파악되는 2분기 이후 2차 추경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세종=조유진 기자 tint@asiae.co.kr
세종=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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