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이기수 한국법학원장이 말하는 '법치'
상대방 '악'으로 모는 이분법 사고 만연
법을 수단으로 보는 '법에 의한 지배' 안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헌법정신 되새겨야
이기수(80) 한국법학원장(전 고려대 총장)은 늘 헌법 책자를 지니고 다닌다. 고려대 총장 퇴임 후 종종 갖는 강연의 단골 주제도 '대한민국의 가치,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다. 그는 헌법 정신에서 벗어난 삶은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한국법학원 건물에서 평생을 법학자와 교육자로 일관한 원로의 고언(苦言)을 아시아경제가 들었다.
이 원장은 대한민국이 맞닥뜨린 위기에 대해 "5류(流)로 추락한 정치권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짚으면서,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당연시하는 형식적 법치주의가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고 했다. '사이비 법치주의'가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야 할 것 없이 이른바 '내로남불'식 주장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며 "당쟁이 극심했던 조선시대에도 탕평(蕩平)의 정신이 있었다는 점을 잊지 말라"고 했다. 아울러 "초·중등학교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헌법 정신을 가르쳐야 한다"는 제안도 잊지 않았다.
![[갈등 넘어 화합으로]이기수 원장 "헌법정신 훼손 형식적 법치주의 팽배… 정치권 큰 책임"](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25041010011614277_1744246876.jpg)
다음은 일문일답.
-우리 사회 위기의 근원은 무엇이고, 치유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인 가치관이 무너졌다. 정의와 불의, 선악 구분의 기준이 훼손되고, 같은 편이면 정의이고 선, 상대편이면 불의이고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팽배해 있다. 이는 '5류'로 추락한 우리 정치권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사회 문제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로 해결할 수 없다. 헌법 10조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인간으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내 편이 소중하면 상대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사회 구성원들이 갖도록 어릴 때부터 가정, 학교, 사회, 종교 등 각 분야에서 노력해야 한다. 정치권의 각성과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이 필요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말씀 주신대로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검투사 정치'가 이어지고 있다. 주기적으로 이어진 탄핵 사태도 그 연장선에 있다.
▲정치는 대화와 타협의 기술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 정치 현실은 상대를 대화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행태가 팽배해 있다. 맹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의(義)의 단서라고 했다. 성경에서도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라고 하지 않았나. 먼저 내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의 잘못만 들춰 공격하지 말고, 정치권은 애국애족하는 마음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당쟁이 극심하던 조선에도 탕평정신이 있었다.
-수많은 법조인들이 정치 분야에 진출했다. 그런데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는 갈수록 심하다.
▲법치주의 이념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할 법조인들이 오히려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 즉 법률을 자신이 속한 집단에 유리하게 사용하려는 형식적 법치주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한 듯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률가는 결코 법률을 이용해 국민 위에 군림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권리를 잃은 국민에게 법률로써 그 권리를 구제해주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헌법 전문에 나오는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는' 정신이다. 여야 할 것 없이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한다. 이런 법조인들을 제자로 길러낸 저를 비롯한 법학교수들 책임이 없지 않다. 다수결의 원리가 지배하더라도 늘 소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와 타협으로 법을 만들어야 모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다. 다수의 힘으로 무조건 밀어붙이는 야당의 입법 폭주는 비판받아 마땅하고, 야당 잘못만 지적하는 여당 책임도 가볍지 않다.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한 법조인들은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는' 헌법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극단주의의 득세, 정치 양극화 못지않게 우리 사회는 이념과 세대, 계층의 양극화와 대립을 겪고 있다. 어떻게 풀어야 하나.
▲도덕재무장 운동이 필요한 때다.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이 올바로 서야 한다.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고, 생각이 다른 상대방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우리 사회와 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 주시던 성철 스님, 김수환 추기경 같은 지도자들이 그리워진다.
-갈등 봉합, 통합의 출발점으로 '개헌'을 얘기하기도 한다.
▲현행 헌법은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헌법 전문) 개정된 것이다. 당시엔 대통령의 귄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견제 장치로 국회해산권을 폐지하는 등 의회 권력을 강화했는데 작금에 와서는 의회 권력이 입법 폭주를 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우선 헌법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이를 운용하는 정치권에 더 큰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짚어둔다. 그러나 적어도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서로 다르고, 장기집권 방지를 위해 만들어진 5년 단임 대통령제가 4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나라에 맞는지는 검토할 때가 됐다. 특히 상호 견제와 균형이라는 3권분립의 정신에 맞는 체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차기 대통령은 오로지 국가와 민중을 위해 대통령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할, 존경받는 대한민국 국민이 선출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헌법 제66조 제1항),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하는 대통령'(헌법 제67조 제1항)이다.
-원장님은 상법의 권위자시다. 상법 개정 갈등도 커지고 있다. 현실에 맞고 합리적인 해법은.
▲거시적인 법체계의 정합성에 비춰 보면 충실의무의 대상에 '주주', '총주주'를 추가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현행법상 선관주의의무와 충실의무를 이질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즉 이사의 충실의무의 대상에 기존의 회사 이외에 주주를 추가하는 것은 개념·요건이 모호하고, 효과를 가늠할 수 없다는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충실의무의 대상에 주주를 추가한다면 해석상의 왜곡이 발생하게 된다. 우선 상장회사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특례법인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풀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상법 외에도 경제관련 법률을 둘러싼 논란도 적지 않다.
▲관련 법들의 개편, 그 과정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각 진영이 너무 표를 의식하지 말고 무엇이 우리 사회를 위하여 진정 필요한 법률·제도의 나아갈 방향인지를 거시적 차원에서 고민하고 대안을 제안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시야를 넓게 갖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민주적 기본질서와 법치에 대한 국민 인식을 확산시키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초·중등 교육 과정에서부터 대한민국 건국사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헌법의 기본정신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법을 몰라서 불이익을 받는 국민들이 적지 않은데, '법의 무지는 용서되지 않는다(ignorantia juris nocet)'는 로마 시대의 법언(法諺)을 되새겨야 할 때다. 그보다 더 우선돼야 할 일은 사회지도층 인사들부터 법을 지켜나가는 준법정신의 솔선수범이다. 우리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보면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주민등록법 위반(위장전입), 도로교통법 위반(무면허, 음주운전 등)을 한 사례가 너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래서야 어떻게 국민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할 수 있겠나. 법을 지키면 이익이 되고, 법을 어기면 손해가 된다는 인식이 확산돼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법과 관련한 실용적 문제도 여쭙겠다. AI(인공지능)가 법률영역에도 들어왔다.
▲생성형 AI, 블록체인, 핀테크, 자율주행자동차, 빅데이터를 둘러싼 쟁점 등 과학기술 발전이 우리 사회와 실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기술의 진보 속도가 빠른 만큼 법 제도도 그에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 AI는 이제 법률 영역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대법원에서도 이제 AI를 통한 시스템 구축을 해 나가고 있다고 한다. 강 건너 불구경할 때가 아니라 AI의 법률 영역 활용을 적극적으로 해나가야 하고, 우리나라가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AI개발 인력이나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기술 변화에 의한 혁신은 지원을 하되 기존 영역에 역차별이 되지 않도록 법률 시스템이 대응해야 한다. 기술 진보로 인한 혜택을 기업과 국민이 공히 누릴 수 있도록 기존의 규제는 과감하게 풀어주면 좋겠다.
이기수 한국법학원장은 누구
고려대 총장을 역임할 때 CEO 총장, ‘형님 리더십’으로 유명했다. ‘주례를 서달라’는 후배들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할 정도로 정이 많았고, 총장이 되기 전인 교수 시절 주례로 맺어준 부부만 246쌍이라고 한다. 독일 튀빙겐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84년 고려대 교수로 임용돼 법대학장, 법무대학원장을 거쳐 2008년부터 3년간 제17대 고려대 총장을 지냈다.
학회나 법률관련 단체를 이끈 경력은 셀 수 없을 정도다. 주요한 것만 추려도 한국상사법학회장을 비롯해 한국도산법학회장, 대한중재인협회장 등이다. 대법원 양형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난해 10월부터 국가원로회의 공동의장도 맡고 있는, 말 그대로 우리 사회의 원로다.
한국법학원은 격년제로 한국법률가대회를 개최하고 격월간 학술지 ‘저스티스’도 발행한다. 이 원장은 내년에 여는 한국법률가대회를 세계법률가대회로 확대 개편하는 것을 꿈꾼다, 미주와 유럽, 아시아 법률가 조직과 연대해 공동주최한다는 것이다. 이 원장의 추진력이라면 안 될 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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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환 기자 khba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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