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평화 '캠프데이비드 협정' 이끌어
이란 인질 위기·경기 침체로 재선 실패
3차례 방북 등 평화 중재 활동에 노벨상 수상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고향 조지아주 플레인스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100세.
카터 재단은 성명을 내고 이날 카터 전 대통령이 자택에서 가족들이 있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카터 전 대통령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장수했다. 피부암으로 투병한 이후 여러 건강 문제를 겪던 중 작년 2월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가정에서 호스피스 완화 의료 서비스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카터 전 대통령은 땅콩 농장주이자 미 해군 출신으로 1962년 조지아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경쟁자가 부정선거로 낙마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71년 조지아 주지사에 당선됐고, 1976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에 선출돼 현직인 공화당 제럴드 포드 대통령을 꺾고 제39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재임 기간에는 이란 인질 위기와 석유 파동,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속 경기침체) 등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재선에 실패했지만, 퇴임 후 세계 평화를 위해 활동해 '가장 위대한 미 전직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후 강경파 대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 대사관 직원 등 52명을 444일간 억류한 사건으로 민심을 잃었다. 특수부대를 투입해 구출 작전을 시도했으나 미국인 8명이 숨지며 실패로 끝났다. 이후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에게 대패했다. 또 물가상승률이 두 자릿수로 치솟고, 실업률도 상승하는 가운데 경기 침체를 겪으며 어려움을 겪었다.
재임 기간 대표적 업적에는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불리는 중동 평화 협상 중재 성공이 꼽힌다. 1978년 9월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해 협정 체결을 주선했다. 이듬해 3월 양국이 적대행위를 끝낸다는 조약 체결로 이어져 중동 평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1982년 카터 센터를 설립하고 국제 평화와 민주주의, 인권, 공중 보건 등을 위한 활동에 나서며 퇴임 후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 '가장 위대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도 얻었다.
한반도와도 인연이 깊다. 대선 출마 당시 박정희 정권의 인권 문제를 이유로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 계획을 밝혔고, 취임 이후 이를 추진하면서 마찰을 빚었다. 2018년 3월 펴낸 회고록 '지미 카터'에서 1979년 6월 방한 당시 한미 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 한국의 핵무장 등을 둘러싸고 박 전 대통령과 충돌한 것을 언급하며 "동맹국 지도자와 가진 토론 가운데 아마도 가장 불쾌한 토론"이라고 했다.
퇴임 후인 1994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한 '1차 북핵 위기' 때 직접 평양으로 날아가 김일성 주석과 회담했다. 이 외에도 2010년 8월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을 석방하기 위해 두 번째로 방북했고, 2011년 4월 국제 원로 정치인 모임 '디 엘더스' 소속 전직 국가수반 3명과 함께 다시 방북했다.
아내 로잘린 여사와 직접 망치를 들고 봉사단체 '해비타트 프로젝트(사랑의 집짓기)'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밖에도 에티오피아, 수단, 아이티,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 국제 분쟁 지역에서 중재자이자 해결사로 나섰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카터 대통령은 2015년 8월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이 간과 뇌로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다가 그해 말 완치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합병증을 앓았으며 2019년에는 낙상으로 뇌 수술을 받기도 했다.
작년 11월 향년 96세의 나이로 별세한 로잘린 여사의 장례식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유가족으로는 자녀 4명과 손주 11명, 증손주 14명이 있다.
오수연 기자 syoh@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