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업 본질은 현장 실행력
엔지니어와 고객 머리 맞대야"
"반도체는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입니다. 싸움에서 밀리면 한국 반도체의 미래는 없습니다. 모든 힘은 현장에서 나오는 만큼, 삼성 반도체가 다시 도약하려면 현장 총책임자에게 전권을 줘야 합니다."
1990년대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를 세계 1위로 올리고 삼성 시스템(비메모리)반도체의 기틀을 닦은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은 지난달 31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삼성전자가 현재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선 정공법 외에 답이 없다고 했다. 삼성전자는 이날 반도체 영업이익이 4조원에 못 미치는 3분기 실적을 내놨다. 메모리는 선방했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는 여전히 적자를 면치 못했다.
임 전 사장은 파운드리 사업에 대해 "삼성전자가 다소 쉽게 본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며 "전략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2019년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을 통해 팹리스, 파운드리에서 2030년까지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는 비전을 내놓은 바 있다. 전략상 파운드리에 힘을 실으면서 메모리까지 덩달아 약해졌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는 "메모리와 비메모리 병행 운영에 따라 자원을 분산한 게 실수였다"고 말했다. 다만 파운드리 분사에 대해선 "투자 여부가 불확실하다"며 "위험해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삼성전자는 TSMC보다 앞서 2㎚(나노미터·10억분의 1m) 게이트 올 어라운드(GAA) 공정 양산에 성공하면서 주목받은 바 있다. 하지만 수율(양품 비율) 등이 다소 떨어져 고전하고 있다. 반면 TSMC는 3㎚ 공정 수율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는 "최선단 공정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술력의 안정도 중요하다"며 "파운드리는 긴 호흡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 대만 TSMC가 일본 투자를 통해 이미지 센서 파운드리를 중심으로 세운 것처럼 삼성전자도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등 특정 칩을 중심으로 비메모리 전략을 세우는 방법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임 전 사장은 과거 삼성전자가 일본을 이기고 메모리 세계 1위를 달성할 수 있었던 건 끊임없는 위기의식이 컸다고 했다. 그는 "1996년 메모리 가격이 급락하고 치킨게임이 시작됐을 때는 그야말로 전쟁이었다"며 "이건희 선대 회장 이 위기의식을 불어넣고 '이겨야 한다'는 임직원들의 마음가짐이 결국 승리를 이끈 것"이라고 했다.
임 전 사장은 삼성전자가 내실을 다지기 위해선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메모리 반도체에 필요한 줄기기술은 500여개 정도"라며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부족한 부분이 뭔지를 파악해야 하는 게 과제"라고 했다. 이를 위해선 결국 현장이 전권을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그는 전영현 부회장을 반도체 수장으로 앉힌 결정부터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전 부회장은 과거 반도체 설계업무를 담당했고 '2차 치킨게임'으로 불린 2007~2009년 메모리 반도체 전쟁에서 대만을 물리친 이력을 갖고 있다.
임 전 사장은 인터뷰 내내 기술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만큼 삼성전자, 더 나아가 한국 반도체에서 인재를 확보하는 게 쉽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삼성전자가 반성문을 쓰게 된 근본적인 배경도 기술력 약화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임 전 사장은 자신의 저서 '히든 히어로스'에서도 핵심 기술당 3명씩 약 5000~6000명의 정예 멤버를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기술을 잘 아는 인물을 부문장, 사업부장, 상무 등의 주요 직책에 배치하고 강력한 기술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임 전 사장은 삼성전자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고객에 대한 이해도를 더 높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삼성이 과거 일본 메모리 업체들을 모두 제친 것도 고객이 원하는 다양한 제품을 빠르게 공급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PC용 칩 수요가 급증할 때 경쟁사들이 연간 5개씩 신제품을 출시할 때 삼성전자는 매년 20개의 칩을 선보였다.
그는 "반도체업의 본질은 현장 실행력"이라며 "제품기획, 사업 전략, 고객 영업 모두 기술 조직에서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특히 "현장 엔지니어들이 고객과 직접 맞대며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임 전 사장은 삼성전자의 부진에 대해 "결국 시간을 어떻게 쓰냐의 문제"라고 했다. 삼성전자가 기술 경쟁력을 다지기 위해 최소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만큼 무엇을 어떻게 채울지가 관건이라는 얘기다. 그는 "기술자가 존중받는 분위기를 만들고 미래 사업은 대세기술 가능성이 있다면 무조건 하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삼성전자 입장에선 SK하이닉스라는 경쟁상대가 건재하다는 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SK하이닉스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앞세워 전세계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는 게 삼성전자에는 자극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국가 차원에서 보면 한국의 메모리는 경쟁을 통해 당분간 괜찮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가 치고 나가면서 중국 업체 등의 추격을 따돌리고 삼성전자가 재정비할 시간도 벌었기 때문이다. 그는 "D램, 낸드플래시 '원투(세계 1·2위)'를 사수하면 한국 반도체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담=최일권 산업IT부장
정리=문채석 기자
최일권 기자 igchoi@asiae.co.kr
문채석 기자 chaes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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