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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어부들의 오래된 금기[속초·고성의 아픔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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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이재킹'…납북·월북자 가족 피해 조명
집안 수색당하고 외딴 곳 끌려가 고문 받아
신분 조회 걸려 취업 길도 막혀…보상·지원 無

편집자주영화 '하이재킹' 배경은 1971년 강원도 속초다. 여객기에 탑승한 용대(여진구)가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내에 사제폭탄을 터뜨린다. 순식간에 조종실을 장악하고 승객들에게 공포한다. "지금부터 이 비행기 이북 간다." 납북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북한에 여객기를 넘기고 받을 혜택과 억압된 삶에서의 해방이다. 분단의 아픈 상처가 삶을 내내 옥죄었다. 가족이 월북하거나 납북됐다는 이유로 감시당하고 통제받았다. 그 고통은 과거의 일로 그냥 덮고 넘어가기에 너무나 컸다. 다시 짚어내고 풀어내야 할 아픈 상처다.

동해안 어부들의 오래된 금기[속초·고성의 아픔①] 영화 '하이재킹'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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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와 한국전쟁 전까지 북한 영토였던 고성에는 오래된 금기가 있었다. 북한에 끌려갔다 온 이의 이야기다. 어떻게 납치됐고, 뭘 했는지, 심지어 누가 돌아오지 못했는지도 발설해선 안 됐다. 설사 새어나가면 간첩으로 몰리거나 감시받기 일쑤였다. 납북이나 월북, 심지어 분단으로 가족과 헤어진 이들의 처지도 다르지 않았다. 방첩대에 수시로 집안을 수색당했고, 때때로 외딴 건물로 끌려가 고문받았다. 신원조회에 걸려 취업 길이 막히는 경우도 허다했다. 용대는 그런 아픔을 견뎌온 청년이다.


설악신문사에서 2008년 펴낸 '동해안 납북어부의 삶과 진실'에 따르면 피해 사례는 수두룩하다. 고성 거진읍에 사는 백성현 씨는 가족이 두 명이나 납북돼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는 1950년대 말 주문진 배인 광영호를 타고 납북됐다 돌아왔다. 동생은 1967년 남풍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납치돼 지금도 생사를 알 수 없다. 당시 배들은 나침판에만 의존해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부들은 겨울철 명태가 북쪽에 몰려있어 어로 저지선까지 바짝 올라가 작업했다. 월선 여부는 해양 경비정의 위치로 확인했다. 경비정보다 위로 올라갔다 싶으면 저지선을 침범했다 판단하고 내려왔다.


백 씨 동생이 탄 남풍호는 재빨리 뱃머리를 돌려 남하하다 전복 사고를 당했고 이후 북측에 끌려갔다. 동생이 납북된 뒤 백 씨 가족은 감시에 시달렸다. 백 씨는 다른 동생이 조난사고를 당한 일이 가장 슬프다고 토로했다. 주문진 수고를 졸업하고 어업무선국(오늘날 어업정보통신국)에 취직하기로 했는데, 신분 조회에 걸려서 취직 길이 막혔단다. 결국 고향에서 배를 타게 됐고, 1985년 풍랑으로 목숨을 잃었다.


동해안 어부들의 오래된 금기[속초·고성의 아픔①] 납북됐다 귀환한 어부들[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속초시 영랑동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한 김창권 씨는 아버지가 납북되고 돌아온 1970년 초를 잊지 못한다. 부친 김봉호 씨는 창동호 선장이었다. 1971년 동해 어로 저지선 부근에서 멸치잡이하다가 납북됐다. 그와 선원들은 이듬해 귀환했으나 바로 구속돼 춘천으로 끌려갔다. 납북된 상황과 이북에서의 행적을 조사받았다. 김봉호 씨는 피랍 당시 선원 한 명이 납북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살해 경찰로부터 혹독한 문책을 받았다. 결국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아 옥살이했다.


가장 없이 3년을 지낸 가족도 고생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당시 속초 어민들은 흉어로 살림살이가 고달팠다. 속초시에서 구호양곡(재해나 재난으로 어려워진 사람에게 무상으로 주는 양곡)을 풀었을 정도다. 정상적인 어부 집안도 먹고 살기 힘든데 아버지도 없는 집은 오죽했을까. 김창권 씨를 포함한 형제들 모두 제대로 못 먹고 공부도 할 수 없었다. 여섯 명 가운데 두 명을 빼고는 모두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배를 탔다.


부친은 출옥 뒤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자유로운 생활도 불가능했다. 타지에 갔다 오려면 반드시 파출소에 가서 신고해야 했다. 김창권 씨는 답답한 마음에 파출소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걸음도 겨우 걷는 사람이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신고하라고 하느냐"며 따졌다고 한다. 그 역시 부친의 납북으로 숱한 좌절을 맛봤다. 기차 칸 판매원 등으로 취직했으나 신분 조회에 걸려 일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속초를 떠나지 못하고 다시 배를 타야만 했다.


동해안 어부들의 오래된 금기[속초·고성의 아픔①] 1972년 납북된 오대양호 선원들이 1974년 북한 묘향산에서 찍은 단체사진. (사진제공=납북자가족모임)

김창권 씨는 2008년 3월 속초 문화회관에서 열린 납북 피해자 보상설명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아무런 보상도 지원도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참석한 피해자와 가족 대다수도 같은 처지였다. 지원 대상이 협소해 앞다퉈 부조리를 성토했다. 16년이 흐른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당시 이북에 갔다 온 사람 중 단 한 사람만이 살아있다. 보상신청을 하려고 서류를 다 준비해 놓았는데, 통일부에서는 기다려보라고만 한다. 납북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보상이 안 된다고 한다."


"형이 납북되어 돌아오지 않고 있다. 거진에는 6개월, 1년 이상 납북돼 갔다 온 사람이 많다. 그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떤 친구는 육사에 붙었는데 신원조회에 걸려 진학을 포기했다. 연좌제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고생했는데, 이런 피해에 대해서는 왜 보상해 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5공화국 초기까지도 항상 감시받으면서 살아야 했다. 지금 고문을 당해 후유증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나."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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