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오르고 가계부채 다시 늘자
금융당국 '그림자 규제' 만연
구두경고·행정명령·모범규준으로 방향 설정
금융소비자 곤란, 은행들 경영애로 '부작용'
"중장년 고객들이 덜 억울해야 하니까요." 지난달 24일,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설계를 바꾼 인터넷은행의 이야기다. 만기 15·25·25년 상품은 모든 연령에 똑같이 적용하지만 가장 만기가 긴 상품을 다르게 구성했다. '만 34세까지는 50년' '만 35세 이상~만 39세 이하는 45년' '만 40세부터는 40년' 만기만 선택할 수 있다. 금융위원회가 50년 만기 주담대를 가계대출 증가의 원인으로 꼽고 "연령제한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하자 내린 고육지책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8월 초만 해도 있던 3%대 주담대 금리까지 사라졌다. 당국이 가계대출 증가의 또 다른 주범으로 '싼 금리의 비대면 대출'을 지목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은 "인터넷은행이 차주의 소득심사를 면밀하게 하고 있는지, 연체 위험을 관리하고 있는지 점검하겠다"며 지난달 말 현장 조사를 했다. 황당한 건 소비자다. 여기서 주담대를 받으려 했던 김우식씨(33)는 "인터넷은행 금리가 제일 낮다고 하길래 알아봤더니 금리가 그새 올랐더라"며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봐서 40년 만기로 대출을 받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고 했다.
법률은 아니지만 위력은 그 이상
법률은 아니지만 법률만큼 위력을 발휘하는 '그림자 금융규제'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금융권 임직원들이 "현 정부 들어 정책 예측 가능성이 더 떨어졌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대출금리가 상승하고 가계부채가 우상향을 그리기 시작한데다 연체율까지 올라 금융사 건전성이 주목받으며 당국의 주문이 쏟아졌다. 그 주문들은 대체로 구두 권고와 지침, 행정지도, 모범규준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선의의 개입이라는 데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법적 근거 없는 행정행위가 만연하면 부작용도 생긴다"고 했다.
작년 7월만 해도 이럴 줄 몰랐다. 당시 이복현 신임 금융감독원장은 "불합리한 금융 감독 관행(그림자 규제)을 개선하겠다"며 태스크포스를 출범했다. 그림자 규제 중 필요한 건 규정으로 만들고, 실익이 없는 건 지우는 게 목적이었다. 지금까지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왔다. "1년 넘게 '금리 올려, 금리 내려' 사인을 수시로 주며 시장 가격에 개입하는 것부터 시작해 금융지주 CEO를 교체하는 것까지 은행의 중요한 경영 사안은 그림자 규제에 의해 좌지우지됐다"는 게 업계 평가다.
법령 규제보다 숨은 규제가 훨씬 많아
현재 금융회사가 체감하는 그림자 규제가 몇 개나 존재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규제정보포털에 금융위원회 규제 현황에 법률상 명문화된 건수가 있긴 하지만 현실과 괴리가 크다. 금융당국 관계자도 "이 수치는 금융시장에서 느끼는 규제 개수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과거 기록으로 짐작은 할 수 있다. 지난 2014년, 당시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금융 현장의 숨은 규제를 발굴하고 개선을 추진하겠다"며 넉 달 동안 전수조사를 했었다. 그 결과 밝혀진 규제목록은 총 3100건. 법령 규제(1100건)보다 숨은 규제(2000건)가 훨씬 많았다. 당시 금융위 보도자료를 보면 "법령규제 위주로 개혁해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책금융기관, 금융권 협회에 규제가 많이 숨어 있다"는 문구가 있다.
이런 그림자 규제들이 금융회사 경영에 발목을 잡기도 한다. 위기 상황에서 금융사의 손실흡수능력을 보여주는 핵심 지표 중에 '보통주자본비율'(CET1)이라는 게 있다. 위험자산 대비 보통주 자본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비율이다. 규제 하한선은 5대 은행 8%, 나머지 은행 7%이지만 당국은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지난 3월 금융위원회는 "작년 9월 말 기준 국내 은행권 보통주 자본비율은 12.26%로 유럽연합(14.74%), 영국(15.65%), 미국(12.37%) 등 주요 선진국 은행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한 적이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명문화 된 규제가 있지만 이는 무시하고 한 자릿수로 떨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게 당국과 은행들 간의 암묵적인 룰"이라며 "자회사 인수합병을 해야 하거나 보통주 소각이 필요할 때 걸림돌이 된다"고 했다.
기록도 없고 근거도 없는 그림자 규제가 이어지면, 문제가 터졌을 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부작용이 생긴다는 게 금융권의 우려다. 시중은행 부행장은 "금융당국의 지시사항은 보통 전국은행연합회를 통해 은행들이 자율적으로 실행하는 것처럼 포장이 된다"며 "여론의 호응을 얻고 대통령에게 칭찬받으면 당국은 우리가 지시한 거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문제가 생기면 당국은 발을 빼고 해결은 고스란히 은행 몫이 된다"고 했다.
그림자 규제 '막아야 vs 필요해'
제도적으로 그림자 규제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과거 금융위 공무원이었던 성대규 신한라이프 이사회 의장은 '그림자 금융규제'라는 저서에서 "모범규준, 행정지도, 과도한 보고받기, 하위규정, 인사개입을 줄이기 위해 '금융규제혁신법'을 만들어 법치금융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성 의장은 이 중에서도 모범규준을 대표적인 그림자 금융규제로 꼽았다. 당국이 법은 아니지만 강제력 있는 규범을 만들고 싶을 때 금융 관련 협회를 활용해 모범규준을 만든다. 성 의장은 이 모범규준을 금융사들이 내부 기준에 반영하도록 해선 안 되고, 이를 위반해도 제재를 하는 불이익을 줘선 안 된다고 했다. 이자율과 수수료 같은 금융상품 가격에 대한 행정지도 역시 안 된다고 했다.
금융 산업 특성상 그림자 규제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2011년, 소상공인 카드가맹점 수수료율 인하 사건만 봐도 금융당국의 선택지가 제한돼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시 국회는 "사회적 약자인 소상공인을 위해 왜 일하지 않느냐"며 당국을 다그쳤다. 중소가맹점의 신용카드 수수료율을 낮출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는 당국은 카드사 회의를 소집하고 전화를 거는 수밖엔 방법이 없었다. 이후 여러 차례 수수료가 떨어졌다.
성태윤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은행처럼 라이센스를 받아 영업하는 경우 독점력을 행사하는 부분에 대해선 그림자 규제가 필요하다"며 "예를 들어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은 법을 통해 경직적으로 다루기가 어렵고, 금융 행위의 상당 부분은 법으로 정하기가 힘들어서 감독 당국의 재량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심나영 기자 sn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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