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이경 폴라리스 어드바이저 대표
20여년간 세계 호텔·리조트 개발…동양인·여성 차별 맞서며 경력 쌓아
“사람도 공간도 경계 허물어야”…‘도심 호캉스’ 고정관념 깰 사업 구상
20여년간 세계 각지를 돌며 호텔을 세운 그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지은 지 50년 넘은 작은 여관을 산 것이다. 구치소 옥바라지하던 사람, 달방 살이하며 하루 벌이를 하던 노동자 등이 머물던 공간을 살핀 지 하루 만에 계약했다. 원래 있던 구들은 트고, 대신 작은 창은 남기며 낡은 여관을 다듬었다. 완성된 건물에는 '원앙아리'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자신의 사무실이자 누구나 와서 쓸 수 있는 공간이다.
"(원앙아리는) 길을 만들어 주고, 막힌 곳을 뚫는다는 순우리말입니다." '메리어트' '힐튼' 등 이름난 호텔 개발을 진두지휘해온 한이경 폴라리스 어드바이저 대표의 이야기다.
한 대표는 1989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 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건축을,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대학원에서 부동산개발을 공부했다. 졸업 후 미국과 네덜란드에서 건축가로 일하다 30대부터 20여년간 전 세계를 돌며 ‘메리어트’ ‘힐튼’ 등 글로벌 호텔 그룹의 호텔과 리조트 개발을 이끌어 ‘호텔 업계의 대부’로 불린다. 부동산 컨설팅 등의 사업을 하는 폴라리스 어드바이저 대표를 2018년에 맡으며 귀국했다. 한국에서는 서울 ‘조선 팰리스’ 판교 ‘그래비티’ 등의 호텔 개관을 담당했다. 폴라리스 어드바이저는 메리어트 측의 신규 호텔 프로젝트 등도 맡고 있다.
한국에서 첫 프로젝트는 뜻밖에도 원앙아리를 짓는 일이었다. 공간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녹여내는 데 집중했다. 사무실 한쪽 벽은 벽지 대신 외벽이 드러나 독특한 느낌을 줬다. 한 대표는 "원래 단열 효과를 생각하면 외벽은 드러내는 게 아니다"라면서도 "공간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것은 고정관념으로, 낡은 건물 외벽을 왜 숨겨야 할까 싶어 과감하게 마감재 아래 숨겨져 있던 곳을 드러냈다"고 설명했다.
이는 곧 한 대표의 인생철학인 '경계 부수기'와 맞닿아있는 대목이다.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던 그는 실용 학문을 고민하다 '구조'와 맞닿은 건축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결심한 후 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건축학을 전공했다. 그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호텔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여자가 호텔에 들락날락하는 게 웬말이냐"는 시선이 있었지만, 호텔이 주는 공간의 매력에 빠져 발을 들였다.
꿈을 이루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마주한 벽은 고정관념이었다. 서구 사회, 여기에 부동산 개발이라는 '남초집단'에서 동양인 여성으로 일하기는 쉽지 않았다. 한 대표는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부동산 개발 시장에서는 의사소통 능력이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소극적인 사람 정도였는데, 미국에서는 바보 취급을 당했다"라며 "여자, 아시안 등 여러 층위의 정체성이 핸디캡으로 작용했지만 생존을 위해 성격부터 바꿔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먼저 능동적으로 행동했다. 한 대표는 "출장을 가면 비행기 창가 좌석에 상사를 몰아넣고 궁금한 것을 전부 물어봤다"며 "결국 상사가 기특하다며 일을 다 가르쳐줬다. 안전모 쓰고 현장도 다니면서 그분에게 일을 다 배웠는데, 건설사를 선정하고 비용 정산하는 것까지 나중엔 내가 다 맡아서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버티는 힘을 길렀다. 인생이나 호텔이나 기둥을 세우고 지어 올리는 과정은 비슷하다고 본다. 한 대표는 "호텔 하나를 짓고 문을 여는 데 짧게는 2~3년, 길게는 5년도 걸린다. 그동안 작업자들과 매일 수많은 대화와 설득을 반복해야 한다"며 “중심을 잡는 일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지난 20년간 수없이 실패하며 배웠다"고 강조했다. 이후 아랍에미리트, 싱가포르 등지에서 한 대표는 유명 호텔과 리조트 문을 열었다.
20여년 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이번엔 다른 고정관념과 마주했다. 한 대표는 "외국에서는 창의적인 방법을 많이 찾는데, 한국에서는 정답만 요구하더라"며 "그래서 한국의 호텔도 공간도 다 똑같이 느껴졌다. 아파트도 천편일률적으로 똑같고, 카페나 호텔은 멋만 부리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어느 집에 가도 침대 위치가 똑같은데 어떻게 창의력을 꿈꾸느냐"며 "자본의 논리로 지어진 공간은 좋은 공간이 될 수 없다"고 꼬집었다.
보수적인 문화의 한국에서 일하기 위해 악역을 자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막상 해외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이방인이 돼 있었다"며 "한국은 우회적으로 의견을 내는 문화에다가, 상부의 판단에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이라 일을 하려면 내가 전무후무한 캐릭터가 돼야 했다. 딱 잘라 거절했고, 왜 못하냐고 말했고, 클레임을 넣고 싶으면 본사에 하시라고 대차게 나갔다"고 했다.
그렇게 밀고나가니 성과로 이어졌다. 그가 가장 성공했다고 꼽고 또 애착을 갖는 호텔은 지난해 문을 연 'AC 바이 메리어트 서울 강남'이다. 리모델링 전의 '머큐어 호텔'은 오래되고 어두운 분위기로, 다단계 판매 회사 직원들이 로비에 머물며 영업하는 장소가 된 지 오래였다. 디자인을 대부분 바꿔야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설득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던 호텔 측도 한 대표가 진두지휘하며 호텔을 바꿔나가는 모습에 점차 ‘방에 수영장을 두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식으로 적극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소통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AC 바이 메리어트 강남으로 개관한 후 호텔에 방문하는 고객의 레벨, 매출은 이전과는 다른 수준으로 뛰었다. 한 대표는 "나중에는 오너의 아이디어가 호텔 구조에 반영될 정도로 의사소통이 잘 됐다. 한국 호텔 업계도 같이 성장해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끼게 해준 작업"이라고 회상했다.
한 대표는 또 다른 경계 허물기를 준비하고 있다. 그가 이번에 깨려 하는 고정관념은 '도심 호캉스'다. 유명한 호텔은 대도시에만 있다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자연경관이 좋은 우리나라 지방 곳곳에 충분히 쉴 수 있는 공간, 바로 '한국형 웰니스'를 만드는 사업을 구상 중이다. 그는 "호텔은 도구일 뿐, 궁극적으로는 이상적인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
한 대표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며 "너무나 많은 외부의 소리에 흔들리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원하는 것이 뭔지 조용한 곳에서 충분히 시간을 써서 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한 대표의 인생관은 원앙아리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여관의 오래된 외벽을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또 반대로 과감히 새 통창을 냈다. 1층은 가로막는 중문 없이 커다란 탁자를 두고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했다. 오래된 여관이 새 사무실로 거듭났듯 그간의 경험이 자연스레 새 도전의 발판이 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한 대표는 본인과 같은 길을 꿈꾸는 미래의 여성 리더들에게 벽을 허물고 경계를 넘나드는 일에 나설 것을 당부했다. 한 대표는 "여성 리더가 무조건 강한 모습이어야만 한다거나,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잣대는 필요 없다"며 "치마를 입든 어떤 모습이든, 하드 파워든 소프트파워든 얽매이지 말고 도전하면 된다. 원하는 것은 외치고, 하고 싶은 일에는 얼마든 도전하라"고 전했다.
▶한이경 대표는
1969년생인 한 대표는 1989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 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건축을,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대학원에서 부동산개발을 공부했다. 졸업 후 미국과 네덜란드에서 건축가로 일하다 호텔·리조트 비즈니스에 뛰어들어 미국 ‘피라미드 호텔 그룹’ 부사장, 아부다비 루브르 박물관이 속한 사디야트 섬 문화지구 수석 디자인 매니저, 중국 ‘옥타브’ 부동산 그룹 대표 등을 맡아 일했다. 이후 20여 년 동안 미국 전역과 유럽, 아랍에미리트와 일본, 중국 등을 넘나들며 ‘메리어트 호텔 그룹’ ‘힐튼 호텔 그룹’의 여러 브랜드 호텔과 리조트 개발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현재는 여러 대학·단체 특강자로 나서고 있다.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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