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함께 술을 마신 여성을 억지로 모텔 안으로 끌고가려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하게 만든 남성에게 강간치사죄 유죄가 확정됐다.
이 남성은 자신은 피해 여성과 합의 하에 성관계를 하려고 했을 뿐 강간의 고의가 없었고, 설사 강간의 고의가 있었다고 해도 피해자가 도망가다 죽을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한 예견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23일 강간치사, 감금치사, 준강제추행 등 혐의로 기소된 40대 남성 A씨의 상고심에서 모든 혐의를 유죄로 인정, 징역 5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명령과 5년간 아동·청소년·장애인 관련기관 취업제한명령도 원심 그대로 확정됐다.
재판부는 "이 사건 공소사실을 유죄로 판단한 원심의 판단에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채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강간치사죄, 감금치사죄 및 준강제추행죄의 성립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라고 상고를 기각한 이유를 밝혔다.
A씨는 2021년 12월 12일 자신이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운영하고 있는 스크린골프연습장 손님인 B씨(사망당시 50·여)를 억지로 모텔로 데려가려다, 도망가던 B씨가 모텔 계단에서 추락해 의식을 잃자 B씨를 추행(준강제추행)하고, 결국 사망하게 만든(강간치사 및 감금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에 따르면 평소 알고 지내던 두 사람은 사건 발생 전날 오후 8시20분부터 A씨의 골프연습장에서 자정을 넘겨 함께 술을 마신 뒤 다음날 새벽 1시50분쯤 밖으로 나왔다.
B씨를 집에 데려다 주려던 A씨는 B씨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보고 택시에 태워 울산 남구의 모텔촌으로 데려간 뒤 모텔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B씨를 억지로 끌고 들어갔다.
A씨가 한 손으로 B씨의 어깨를 붙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만든 상태에서 모텔비를 계산하는 틈을 타 B씨는 몸을 숙여 A씨를 벗어난 뒤 급하게 도망을 쳤는데, 그 과정에서 모텔 1층에서 지하로 연결되는 계단에서 넘어져 굴러떨어지면서 의식을 잃었다.
A씨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의식을 잃은 B씨를 앉힌 뒤 옷 안에 손을 넣어 B씨의 배와 가슴 부위를 만졌고, 다시 B씨를 안아 카운터 앞 소파로 데려가 눕힌 뒤 손으로 B씨의 가슴과 허벅지 등을 만졌다.
이후 B씨는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사건 발생 닷새 만인 2021년 12월 17일 뇌사 판정을 받았다. B씨의 유족들은 다음달 6일 B씨에 대한 연명 치료 중단에 동의했고, 의료진이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함에 따라 결국 B씨는 사망했다. 사망진단서상 B씨의 사인은 '두개 내 열린 상처가 없는 외상성 지주막하 출혈로 인한 뇌간의 압박'이었다.
검찰은 A씨가 모텔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B씨를 강제로 모텔 방 안으로 끌고가 감금한 상태에서 강제로 성관계를 가지려다 B씨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판단, 강간치사 및 감금치사 혐의를 적용했다. 또 B씨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의식을 잃은 B씨를 추행했다고 보고 준강제추행 혐의를 공소사실에 포함시켰다.
재판에서 B씨는 강간의 고의를 부인했다. 사건 당일 골프연습장에서 나와 B씨를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길을 걷던 중 분위기가 좋아 "모텔에 갈래?"라고 물었을 때 B씨가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고, B씨도 처음에는 함께 모텔에 가서 성관계를 하는 것에 동의했다가 나중에 술이 깨니 부끄러워서 모텔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고 주장했다. 자신은 B씨와 합의 하에 성관계를 하려 했던 것일 뿐 처음부터 강제로 성관계를 할 생각은 없었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이 같은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함께 이동한 택시의 블랙박스 영상, 모텔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계속 저항하는 B씨를 강제로 모텔 안으로 밀어넣는 CCTV 녹화 영상, 모텔 직원의 진술 등에 비춰 A씨에게 강간의 고의를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A씨와 B씨가 단둘이 술을 마셔본 적이 없을 정도로 사적인 친분관계가 없었고, 사건 당일 B씨가 A씨를 찾아간 것도 A씨가 자신을 위해 돈을 썼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해 그 이유가 궁금해서였던 점 등도 이 같은 판단의 근거가 됐다.
A씨는 또 설사 자신에게 강간의 고의가 있었고, 강간을 위한 강제력을 사용해 강간죄 실행의 착수가 있었다고 해도 B씨가 계단에서 넘어져 사망할 것까지는 도저히 예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간치사죄나 감금치사죄는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강간치사죄 같은 결과적가중범 성립이 인정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건인 '예견가능성'이 없었다는 취지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당시 B씨가 술에 취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A씨가 인지하고 있었던 만큼, 자신이 강제로 모텔 안으로 끌고 들어갈 경우 술에 취한 B씨가 도망가는 과정에서 비틀거리거나 중심을 잃고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는 등의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결국 1심 재판부는 A씨의 3가지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또 8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명령과 5년간 아동·청소년·장애인 관련기관 취업제한명령도 내렸다.
형법상 하나의 행위가 동시에 여러 범죄의 구성요건에 해당될 경우 '한 개의 행위가 여러 개의 죄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가장 무거운 죄에 대하여 정한 형으로 처벌한다'고 규정한 형법 제40조(상상적 경합)에 따라 형이 더 무거운 죄로 처벌된다.
이번 사건에서는 강간치사죄와 감금치사죄가 상상적 경합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형이 더 무거운 강간치사죄의 법정형이 적용됐다. 별개의 범죄인 준강제추행죄의 경우 형법상 경합범 처벌 조항에 따라 강간치사죄 법정형에서 장기의 2분의 1까지 가중된 법정형이 적용됐다.
A씨의 항소로 진행된 2심에서도 A씨의 모든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검찰이 A씨의 준강제추행 혐의 범죄사실을 일부 수정하는 공소장변경을 신청, 재판부의 허가를 받으면서 더 이상 1심 판결은 유지될 수 없었고,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파기하고 다시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적어도 피해자가 피고인과 함께 모텔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한 시점 이후부터는 피고인에게 피해자를 모텔 객실에 감금해 강간하겠다는 고의가 있었고, 피고인이 강간 및 감금행위의 실행에 착수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피해자가 피고인의 침해행위에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끼고 이를 피하기 위해 도피하는 것은 자연적인 결과로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것이고, 이는 위험발생과 연결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사망의 결과가 발생하는 것 역시 개연성이 있고, 피고인이 결과 발생을 좌우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A씨는 1심 재판 과정에서 인정했던 준강제추행 혐의를 2심에서 전면 부인했다. B씨는 자신은 의식을 잃은 B씨의 체온 유지나 혈액 순환을 통해 B씨의 의식을 회복시키기 위해 피해자를 주물렀을 뿐, 모텔 직원이나 출동한 119구급대원이 보고 있거나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추행을 할 이유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A씨가 B씨의 전신을 주무른 것이 아니라 특정 부위만 만지거나 쓰다듬었고, B씨가 계단에서 넘어져 굴러떨어지기 전 모텔 직원이 바로 눈 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서도 개의치 않고 B씨에게 계속 유형력을 행사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이 같은 주장을 배척했다.
다만 2심 재판부는 A씨가 B씨의 유족들과 합의한 점 등을 이유로 A씨의 형을 징역 5년으로 낮췄다. 또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명령도 80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였다.
재판부는 "이 사건 범행은 피고인이 자신이 운영하는 골프연습장의 손님으로 알게 된 피해자가 술을 많이 마시게 된 것을 기화로 피해자를 모텔 방에 감금해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그 과정에서 피고인으로부터 도망치던 피해자가 모텔 계단에서 넘어져 굴러떨어져 결국 사망에 이르도록 하고, 계단에서 넘어져 굴러 떨어진 후 의식을 잃은 상태의 피해자를 추행하기까지 한 것으로서 그 죄질이 매우 중하고 비난가능성도 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재판부는 ▲B씨의 사망이라는 중한 결과가 A씨의 폭행 행위 그 자체에 의해 직접적으로 발생한 것은 아니었고, B씨가 A씨로부터 도망치는 과정에서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넘어져 굴러떨어짐에 따라 발생한 점 ▲A씨가 2008년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1회 받은 것 외에는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는 점 ▲A씨가 2심 진행 중 B씨의 유족들에게 상당한 금액의 합의금을 지급한 후 이들과 합의했고, 현재 유족들이 더 이상 A씨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 등을 양형상 A씨에게 유리한 정상을 참작해 형을 절반으로 줄였다.
대법원도 이 같은 2심의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보고 A씨의 상고를 기각, 2심 판결을 확정했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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