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지금으로부터 329년 전인 1688년 11월5일은 영국사 뿐만 아니라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 '명예혁명'이 일어난 날이다. 이 사건은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를 출발시킨 시발점이며 이듬해 완성된 권리장전은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흔히 명예혁명이란 이름을 갖게된 이유에 대해 정권의 변화가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롭게 추진됐기 때문이라 알려져있다. 당시 프랑스식의 강력한 절대왕정을 추구하려던 제임스2세가 물러나고 그의 딸인 메리2세와 딸인 윌리엄3세가 등극하는 과정이 평화롭게 전개됐다는 것.
하지만 실제로 이 명예혁명의 과정은 결코 평화롭게 이뤄지지 않았다. 명예혁명은 그 주요 원인이 주로 영국 내부의 문제로만 알려져있지만 실제 원인은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14세와 유럽 각국간의 전쟁에 있었다. 프랑스의 호전성을 염려한 네덜란드,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사보이 공국 등이 이른바 '대동맹(Grand Alliance)'을 맺은 상태였는데,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적대하던 잉글랜드가 제임스2세의 등극이후 친 프랑스 정책으로 기울자 네덜란드의 윌리엄3세는 외교적 고립을 피하고자 전쟁을 선택하게 됐다.
![[역사 속 오늘]329년 전 오늘, '명예혁명' 발생…정말 '피 한방울' 안 흘렸을까?](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17110314371908121_2.jpg)
영국 의회 역시 프랑스식 절대군주가 되려는 제임스2세를 퇴위시키고 그의 딸 메리와 사위인 윌리엄3세를 등극시키기 위해 네덜란드 측과 연합했다. 결국 윌리엄은 6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영국 해협을 건너 진격했고, 군사가 분산돼있던 제임스2세는 급히 2만의 병력을 모았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윌리엄3세는 일부러 3개월에 걸쳐 작전을 느리게 전개하면서 주변 민심을 사모았다. 이 과정에서 양군간 수차 충돌이 있었고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그해 12월로 넘어가자 제임스2세의 군대는 포위됐고, 점차 윌리엄 측에 투항하는 병력이 늘었다. 프랑스 측이 제임스2세에게 군사지원을 약속했지만, 제임스2세는 막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 뻔하다며 이를 거절했다. 결국 12월11일, 제임스2세는 도주했다가 그 다음날 어부에게 붙잡혀온다. 제임스2세의 처분을 놓고 고민하던 윌리엄3세는 결국 장인에게 원하면 외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제안했고, 제임스2세는 12월23일 그의 아내가 머무르던 프랑스로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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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임스2세의 군대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일대에 분산돼있었고, 사실 이 군대가 모두 모였으면 제임스2세가 그렇게 허망하게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었기에 이들 병력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재커바이트의 난(Jacobite risings)'이라 부른다. 재커바이트는 제임스의 라틴어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재커바이트들은 매우 오랫동안 항전했다. 이들은 명예혁명을 통해 집권한 메리2세와 네덜란드 출신인 윌리엄3세의 통치를 인정치 않았다. 이들의 반란은 3년만에 진압됐지만 이후 1714년 다시 발생한다. 반란의 이유는 제임스2세의 스튜어트왕가가 완전히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메리2세와 윌리엄3세가 죽고 1702년 등극했던 메리2세의 동생, 앤 여왕마저 1714년 사망하자 왕위계승법에 따라 독일 하노버 왕가가 영국왕가로 등극했다. 이에 스튜어트왕가가 완전히 끊어지자 재커바이트들은 다시금 격렬히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1746년에야 완전히 진압됐다. 명예혁명 후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야 겨우 피로 피를 씻는 전쟁이 끝났다. 명예혁명이라는 말은 정말 단순한 광고문구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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