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뉴욕 김근철 특파원] 세계 최대 도시 미국 뉴욕의 중심가 맨해튼은 매년 9월이면 몸살을 앓는다. 평소에도 극심한 교통 정체로 악명이 높지만 이즈음 맨해튼의 교통 정체는 그야말로 지옥과 같다.
맨해튼 동쪽 끝에 자리한 뉴욕 유엔(UN) 본부 건물에서 지상 최대의 국제 외교 행사인 유엔 총회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제72차 유엔 총회가 열린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총회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일반 토의 기간(지난 19~25일)에 국가원수 90명, 정부 수반 37명 등 190여개 회원국의 대표들이 속속 뉴욕에 입성했다. 맨해튼은 각국 정상과 수행원, 이들을 경호하기 위한 차량과 인원으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뤘다. 18일 뉴욕에 도착한 문재인 대통령이 길이 막혀 차량에서 내려 도보로 행사장으로 이동한 모습은 그리 낯선 일도 아니다.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는 193개 회원국 대부분의 정상급 인사들이 나서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순서는 단연 미국 대통령의 연설이다. 명목상 유엔 회원국들은 동등한 권한과 대우를 보장받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은 유엔의 창설을 이끈 산파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 가장 많은 재정적ㆍ인적 부담을 책임지고 있는 명실상부한 '최대주주'다. 미국은 최근까지 유엔 연간 예산의 22%와 유엔 평화유지활동 예산의 28.5%를 홀로 부담했으니 아주 틀린 표현도 아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미국은 지난 70여년 동안 이를 지렛대 삼아 유엔 사무총장 인선에서부터 유엔의 굵직굵직한 결정과 사업 추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그렇다고 미국과 유엔의 관계가 늘 밀월 관계인 것은 아니다. 미국은 막강한 입김을 통해 유엔을 쥐락펴락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유엔의 설립 명분과 취지는 다자주의와 국제 협력을 통한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다. 독주를 원하는 미국과 다양한 회원국의 목소리를 담아내야 하는 유엔 사이에는 늘 미묘한 긴장 관계가 이어졌다.
흔히 유엔과 관련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조적인 인물로 통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유엔을 '모여서 떠들고 즐기는 사람들의 클럽'이라며 비판했다. 반면 오바마 전 대통령은 대내외적으로 유엔을 통한 국제사회의 협력에 미국이 적극 기여하고 헌신할 것임을 공언해왔다.
실제로 지난 19일 트럼프 대통령의 첫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선 미국의 주권과 관련된 용어가 21차례나 등장했다. 반면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의 첫 유엔 총회 연설에선 이 용어가 단 한 차례만 등장, 현격한 대조를 이뤘다. 그렇지만 오바마 전 대통령 재임 기간에 유엔을 이끌었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조차 미국의 위세에 대한 반감을 심심치 않게 드러냈다. 반 전 총장은 2013년 유엔 송년 만찬에서 미국 정보기관의 무차별한 도청을 풍자한 동영상을 공개, 눈길을 끌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 데뷔 때부터 노골적인 반감과 비판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유엔 총회 기조연설 하루 전인 지난 18일 유엔 개혁회의를 주재한 트럼프 대통령은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면전에서 "관료주의와 행정 실책으로 유엔이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유엔이 돈을 너무 많이 쓰고 직원도 너무 많다"며 쓴소리를 쏟아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유엔 조직과 운영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동시에 미국이 막대한 예산을 부담하고 있는데도 유엔이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기도 하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은 최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강력한 대북제재 요구가 거부권을 보유한 중국과 러시아에 의해 제동이 걸린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최근 대북 독자제재에 나선 것도 유엔이나 다자주의를 통한 외교 압박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9일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도 "나는 미국민에게 힘을 돌려주기 위해 대통령에 뽑힌 것"이라면서 "그래서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웠다"고 말했다. 이어 총회장의 각국 대표들에게 자신이 미국 우선주의를 강조하는 것처럼 다른 나라들도 '자국 우선주의'를 추구하라고 촉구, 참석자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총회 연설을 계기로 수면 아래서 꿈틀거렸던 미국과 유엔 간의 애증과 긴장의 딜레마가 분출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양측의 입장 차이는 향후 유엔 개혁 방안을 두고도 분명히 갈라선다. 최근 유엔 주변에선 핵심 기구인 안보리의 개혁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은 특히 1945년 유엔 창설 당시부터 미국은 물론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가 거부권이라는 특권을 독점하는 것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다. 일부 유엔 전문가들은 7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양화된 국제 관계에 맞춰 안보리나 이사국들의 권한도 재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2006년 유엔 총회 연설에서 전날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연단에 섰던 것을 겨냥, "어제 악마가 여기 다녀갔다. 아직도 유황 냄새가 난다"며 독설을 퍼부었다. 고(故) 무아마르 알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는 2009년 기조연설에서 자신을 '왕 중의 왕'이라고 자칭하는 한편 유엔 안보리가 미국에 의해 좌우되면서 테러를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 물의를 빚었다.
2010년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전 이란 대통령이 유엔 총회장에서 9ㆍ11 테러는 미국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 미국은 물론 서방 외교관들이 연설 도중 퇴장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올해 살벌한 말 폭탄을 주고받은 트럼프 대통령과 리용호 북한 외무상의 설전도 향후 역대급 유엔 총회 기조연설로 기록될 전망이다.
뉴욕 김근철 특파원 kckim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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