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2012년)'의 깡패 이중구, '무뢰한(2014년)'의 살인마 박준길, '오피스(2014년)'의 형사 종훈, '황제를 위하여(2014년)'의 깡패 상하. 그동안 주로 선 굵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최근 제안을 받은 배역들도 다르지 않다. 내 인상이 강하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실감한다. 어찌 보면 축복이다. 특별히 연기를 하지 않아도 감독이 의도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 배우로서 크나큰 장점이다.
나도 내 얼굴이 얼마나 무섭게 생겼는지 잘 안다. 보조출연자로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안산에 집을 구하면서 체감했다. 외국인이 많이 산다는 이유로 우범지대라는 낙인을 찍힌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했다. 가끔 건달들을 마주쳐도, 그들이 먼저 자리를 피했다. 얼굴도 그렇지만, 큰 체구에서 위협을 느낀 듯하다. 한참 운동에 빠져 있을 때라 몸이 보디빌더 못지않았다. 촬영을 없을 때마다 서울에 있는 피트니스센터에서 기구를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책을 읽었다. 손잡이에 목걸이를 걸어놓고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개운할 수 없었다.
촬영을 기다릴 때도 책은 유일한 친구가 돼줬다. 동료 배우들과 이야기하며 긴장을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누구 하나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나긋나긋한 인상이 아니라서 그러려니 했지만, 내심 스트레스가 됐다. 살갑게 맞아주는 선배 한 명쯤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만병통치약은 유명세였다. 드라마 '태왕사신기(2007년)'를 통해 대중에 조금씩 알려지자 배우고 스태프고 할 것 없이 먼저 다가와서 말을 붙여줬다. 용기를 얻어 이제는 내가 먼저 다가가서 사람들과 어울린다. (황)정민이 형(47), (마)동석이 형(46) 등은 한 식구나 다름없다. 깊은 대화로 연기는 물론 영화 전체를 풍성하게 꾸민다.
신세계는 이런 협업의 가치를 일깨운 대표적인 영화다. 내게 인기라는 선물도 줬다. 섭외됐을 때부터 느낌이 좋았다. 내가 아닌 다른 배우는 할 수 없는 역할 같았다. 나홍진 감독(43)의 '황해(2010년)' 속 김태원(조성하)과 윤종빈 감독(38)의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2011년)' 속 박창우(김성균)를 놓친 아쉬움을 깨끗이 씻을 수 있었다.
이제는 여느 배우들도 할 수 있는 배역을 더 잘 그려보고 싶다. 남자 냄새가 풀풀 나는 배역이 아닌 평범한 아버지나 남편 말이다. 지난달 21일부터 방영 중인 드라마 '맨투맨'은 그 시발점이 될 것이다. 까칠하고 제멋대로인 한류스타 여운광을 발랄하고 코믹하게 색칠했다. 코미디 연기를 하고 싶었던 갈증을 단번에 해소했다. 모두 이창민 감독의 배려 덕이다. 드라마 '리멤버 - 아들의 전쟁(2015년)'을 연출하며 나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단다. 이렇게 편견을 깨다보면 언젠가 리차드 커티스 감독(61)이 만든 '어바웃 타임(2003년)' 속 팀(도널 글리슨)이나 '러브 액츄얼리(2003년)' 속 제이미(콜린 퍼스) 같은 역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 박성웅은 영화배우 겸 탤런트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영화 '넘버 3'로 데뷔한 뒤 남성적인 역을 주로 맡았다. 특히 2013년에 개봉한 영화 '신세계'에서 이중구 역으로 출연해 "살려는 드릴게",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와 같이 강렬한 대사로 명장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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