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영주 기자] 그는 올해 43살의 평범한 농부였다. 젊은 시절 병원에서 일을 했고, 2007년에 귀농해 복숭아와 대추 농사를 지었다. 2010년부터 지역 자율방범대 활동을 했다. 지난 2월에는 자율방범대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그가 며칠 전 권총을 거머쥔 은행강도로 돌변했다. 그가 경산시의 한 농협에서 훔친 돈은 1563만원. 그는 빚을 갚으려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주민들은 "성실하고 착해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가족들조차 그의 범행을 몰랐다.
현대인은 어떤 방식으로든 빚을 끼고 산다. 아파트를 사면 주택담보대출을, 전세자금이 부족하면 전세자금대출을, 모자란 대학 등록금은 학자금대출을, 백화점에서 옷을 살 때엔 무이자할부를 쓴다. 홈쇼핑이나 인터넷쇼핑을 통해 몇 백 만원 짜리 해외여행을 10개월 할부로 예약할 수 있다. 수천 만원이 넘는 고급 차를 할부는 물론 리스나 렌트로 탈 수 있다. 은행이나 매장에 찾아갈 필요도 없다. 휴대폰으로 몇 번 터치만 하면 된다. 편의점에서 생수 한 병을 사더라도 현금 대신 신용카드를 쓴다. 모두가 형태만 조금씩 다를 뿐 빚이다.
일단 쓰고 나중에 갚자는 풍조는 금리가 낮아지면서 더욱 만연하다. 재테크 전문가들은 "빚도 자산"이라며 저금리 시대에 빚을 잘 활용하라고 조언한다. 빚을 내서라도 소형 아파트나 상가를 사서 높은 수익을 챙기라고 한다. 빚 권하는 사회다. 벌써 가계가 짊어진 부채는 1300조원을 넘어섰다.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산 친구는 "방 하나와 부엌만 내 재산이고, 나머지는 은행 소유"라고 농을 던진다. 그래도 매달 월세를 내며 사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혼자 벌어 대출 없이 서울에서 아파트를 사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제학원론에서는 화폐의 기원을 '물물교환을 대신할 수단'에서 찾는다. 하지만 일부 인류학자는 차용증서를 대신하기 위해 화폐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고대사회에서는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됐다. 악덕한 전주(錢主)들은 노예를 많이 두기 위해 의도적으로 빚을 지우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빚이 쌓이면 본인이나 자식을 몸종으로 보내는 일이 잦았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빚을 지우는 통로들을 끊임없이 진화시키고 있다. 빚은 자본주의에서 기회가 되지만, 모두가 기회를 잡을 순 없다. 생존게임에서 이겨야 한다. 낙오자는 빚더미를 짊어진다.
정부도 빚을 낸다. 우리나라의 국가부채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1400조원을 넘어섰다. 정부 재무제표상 지난해 국가자산은 1962조원, 국가부채는 1433조원이었다. 순자산은 529조원으로 1년 사이 34조원이나 줄었다. 부채가 140조원이 늘어난 탓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반드시 갚아야 할 국가채무는 627조1000억원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38.3%로 선진국과 비교해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늘어섰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돈 쓸 곳은 많아지는데 세금 낼 사람은 급격히 줄어든다. 대선 후보들은 복지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공약을 실현하려면 세금을 더 걷든지, 빚을 내야 한다. 증세는 쉽지 않다. 결국, 빚이 늘어날 게 뻔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이자'라는 말이 있다. 빚내는 맛에 길들여지면 끊기 어렵다. 장농 속 금붙이마저 내다팔아야 했던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절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조영주 경제부 차장 yjc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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