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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의심…권력 좇는 인간의 내면을 해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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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이다" vs "왕을 움직이는 건 나다"

헨리크 입센의 '왕위 주장자들'
서울시극단, 31일~내달 2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
권력투쟁 갈등 시국 떠올리게 해…김광보 예술감독 "우연의 일치"


믿음과 의심…권력 좇는 인간의 내면을 해부하다 '왕위 주장자들'에서 스쿨레 백작을 열연한 유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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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믿어라 그리고 또 의심하라." 자기가 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호콘과 오랜 세월 왕좌 가까이 있었지만 왕이 되지 못한 채 늙어가는 스쿨레 백작.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오가며 갈등을 심화시키는 니콜라스 주교…. 왕위는 누구의 것인가? 또 인간 욕망의 끝은 어디인가? 인물들 사이의 의심과 자기확신이 5막에 걸쳐 갈등을 일으킨다.


"내가 노르웨이의 왕이다."(호콘 왕역 김주헌)
"왕국을 다스리는 건 나다."(스쿨레 백작역 유성주)
"내 최고의 무기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니콜라스 주교역 유연수)

'호불이웅(狐不二雄)'과 '용나호척(龍拏虎擲)'. 전자는 두 영웅이 한 하늘을 질 수 없음을, 후자는 영웅들이 서로 싸움을 여우ㆍ용과 범에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왕정국가의 왕과 고대(~476년)의 군주. 오늘날 민주법치국가의 대통령에 해당하는 이 자리는 영웅호걸을 자처하는 자들이 용맹한 결투 끝에 얻은 전리품, 합당한 명분을 가진 자가 앉는 황금옥좌였다. 역사에서 왕좌를 둘러싼 인간의 투쟁은 흔하디흔한 주제요 앞으로도 계속될 논쟁이다.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은 역사와 권력이라는 거대 울타리가 아닌, 그 담장 안에서 끊임없이 곡예하는 인간의 내면을 해부했다.

입센의 작품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작품에 버금갈 만큼 세계 각국의 무대에 자주 오른다. 입센은 잘 알려진 '페르 귄트(1867)' '인형의 집(1879)'을 비롯해 '유령(1881)' '민중의 적(1882)' 등 여러 산문극을 통해 가정과 사회에 만연한 왜곡과 부조리를 비판했다. 강한 주제의식과 등장인물의 심리를 탐색하는 기법으로 사회문제극의 대가, 현대극의 아버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1863년에 발표한 '왕위 주장자들(김광보 연출)'도 입센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인데 154년 만에 국내 초연된다. 입센의 작품 스물다섯 편 중 지금까지 열한 편이 국내에 소개됐고 이번 공연이 열두 번째 작품이다. 서울시극단이 창단 20주년을 기념해 오는 31일부터 다음달 2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한다.


믿음과 의심…권력 좇는 인간의 내면을 해부하다 '왕위 주장자들'에서 호콘 왕을 열연한 김주헌.


'왕위 주장자들'은 입센이 쓴 역사극 중 백미로 꼽힌다. 배경은 13세기 노르웨이지만 역사적 맥락과 외적 갈등보다는 각 인물의 불안한 내면상태와 방황을 섬세하게 조명한다. 정교한 심리묘사와 극 전체에 걸친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은 근대를 넘어 '현대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역사는 전경(全景)에 불과하고 주요 인물의 고뇌와 갈등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오늘을 떠올리게 한다. 입센 자신이 연출해 1864년 1월 크리스티아니아(현 오슬로) 극장에서 세계 초연해 성공을 거뒀다. 이 작품을 통해 입센은 '결국 스스로에 대해 확신을 갖고 소명의식과 신념에 따라 자기 일에 매진하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입센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고국 노르웨이를 떠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27년 세월을 보낸다.


왕위 주장자들에는 권력을 지향하는 세 인물 '호콘ㆍ니콜라스ㆍ스쿨레'가 등장한다. 호콘은 확신과 소명의식, 신념을 지닌 인물이다. 왕이 되라는 소명을 부여받았다고 확신하며 왕이 된다. 오슬로 주교인 니콜라스는 겁이 많은 소심한 성격 때문에 왕이 되기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왕까지도 손안에 넣을 수 있는 성직자가 된 인물이다. 실질적인 주인공인 스쿨레는 그 누구보다도 권력에 대한 열망이 크면서도 자신이 과연 적법한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번민하는 고독한 영혼이다.


선왕이 죽은 뒤 자기의 소명을 확실히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감으로 표출하는 호콘왕과 6년간 섭정을 통해 왕국이 자기의 것이라 믿는 스쿨레 백작 사이에 왕위 다툼이 시작된다. 그리고 니콜라스 주교가 등장해 스쿨레 백작의 욕망과 의심을 더욱 부추기며 갈등을 심화시킨다. 치열한 왕권 다툼 속에서 호콘왕은 스쿨레 백작의 딸 마르그레테를 왕비로 선택한다. 욕망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스쿨레가 호콘의 아들이자 자신의 외손자를 죽이려 하고, 갈등은 최고조에 달한다.


믿음과 의심…권력 좇는 인간의 내면을 해부하다 '왕위 주장자들'에서 니콜라스 주교를 열연한 유연수.


이 작품을 번역한 김미혜 한양대 명예교수는 "왕위 주장자들은 인간의 권력욕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권력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끊임없이 의심과 확신을 오고 가는 인물의 심리적인 측면도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각색을 맡은 고연옥 작가(46)는 "권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고, 권력에 대한 냉소만이 아닌 불신과 불안, 매 순간 스스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준다"고 했다. 고 작가는 "스쿨레 백작이 주변인들이 자리를 뜨자 '오래 견딜 수 없다'고 토로하는 장면을 보면 이게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작품은 치열한 왕권 다툼, 권력 투쟁에 따른 인물 간 갈등이라는 점에서 최근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일련의 정치사건과 차기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시국을 떠올리게 한다. 김광보 서울시극단 예술감독(53)은 지난 1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진 제작발표회에서 "2015년 서울시극단장에 취임할 때부터 이 작품을 하겠다고 밝혔었다"면서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극 내용이) 우리 시대와 잘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대선과 맞물려 의도적으로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연의 일치"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주인공들이 절망의 시기를 지나 맞이하는 그 희망이 과연 우리가 바라는 희망인가라는 주제의식도 담겨있다"고 덧붙였다.


스쿨레 백작은 올해 새롭게 서울시극단 지도단원으로 합류한 배우 유성주가 열연한다. 니콜라스 주교는 베테랑 배우 유연수, 호콘 왕은 김주헌이 맡았다. 이 외에 이창직, 강신구, 최나라, 이지연 등 서울시극단 정단원들과 연수단원, 김 현, 문호진 등 실력파 배우 총 스물세 명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장인서 기자 en130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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