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寒波)'가 몰아쳤다. 오늘도 창문 하나 없는 국회 부스에는 정적만이 감돈다. 이윽고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미로 같은 부스 사이로 유력 대선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환한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던 뿌옇게 흐려진 눈을 거두어 잠시 시선을 마주한다.
이마저도 잠시 뿐이다. 지지율 수위를 다투는 이 주자는 형식적인 인사와 악수만 건넨 채 이내 옆 부스로 줄행랑친다. 더 많은 기자를 만나 눈도장을 찍으려는 모양새다. "조만간 인터뷰라도…." 어렵사리 입 밖으로 끄집어낸 말이 공허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2017년을 제대로 점령해 새 시대, 새 역사를 만들자"던 이 정치인이 새해를 맞아 내놓은 사자성어는 '재조산하(再造山河)'였다. 임진왜란 당시 실의에 빠진 류성용에게 이순신이 적어줬다는 글귀다. 폐허가 된 나라를 다시 세우자는 뜻인데, 지금 우리의 상황과 딱 들어맞는다. 지난해 혼돈과 분노에 밤잠을 설친 우리 모두의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 여전히 불안하다. 당장 이 정치인부터 '국가 대청소' '혁명' 등의 단어를 쏟아내고 있다. 대대적인 변화가 도래할 것임을 예고하는 발언들이다. 대척점에 서있는 다른 유력 후보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정치 대통합'을 내세우지만 제대로 된 검증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정확히, 시작도 하지 않았다. 금품 수수설 등 루머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닭의 해인 정유년(丁酉年)은 숨 가쁜 격변의 해가 될 전망이다.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너 죽고 나 살자"는 '치킨게임'이 끊이지 않는다. 아울러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여부가 결론이 나고, 조기 대선과 개헌을 둘러싼 정치권의 여진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진통제만 맞은 조선·해운·철강 등 한계산업 구조조정은 올해가 지난해보다 더 아플 것이라고 한다. 시계 제로인 기업들은 조직개편이나 인사를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양대 축인 미국과 중국은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태풍을 몰아칠 기세다.
두렵다. "올해는 '영화 같은 현실'이 정말 닥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다. 뒤늦게 관람한 영화 '판도라'와 '부산행'처럼 말이다. 지진과 원전폭발, 바이러스 감염 등 예기치 못한 사고로 빚어진 재난은 그동안 믿어왔던 국가라는 존재와 시스템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이번 위기도 마찬가지다. 국내 정치 혼란이 큰 동인이 되면서 예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나 글로벌금융위기와는 또 다른 양태를 띠고 있다.
대권주자들은 올해도 마부위침(磨斧爲針)·사불범정(邪不犯正) 등 다양한 신년 사자성어를 쏟아냈다. 그러나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건 "돈도 실력이야"라던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외침뿐이다. 젊은이들이 꿈을 담아낼 청사진마저 상실한 정유년을 맞는 마음이 유난히 무거운 이유다.
오상도 정경부 차장 sdoh@